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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클레어의 카메라

천천히 복기하는 삶이 아름답다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자세히 듣지 않는다. 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하기 바쁘다. 정치인들이 나오는 토론 프로그램은 도저히 짜증나서 볼 수가 없다. 그들은 토론이 뭔지를 모른다. 토론이란 상대의 말을 듣고 그 다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귀머거리처럼 자신의 말만 한다.


  패널들을 줄지어 앉혀놓고 하는 토크쇼도 마찬가지. 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말을 한다. 조금 전 말한 사람의 의도 따윈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과한 액션과 튀는 얘기로 카메라만 붙잡으면 장땡인 줄 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또한, 그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내 말을 아무도 자세하게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옛날 얘기나,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 다 지나간 얘기를 왜 자꾸 하는 거야?

  부부싸움에서 대부분 남편들이 하는 첫 번째 말일 것이다. 결단코, 단언컨대 ‘다 지나간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가는 대화단절을 초래할 것이고, 오랜 냉전 끝에 ‘황혼이혼’ 혹은 ‘졸혼’으로 이어져 독거노인으로 고독사하기 십상일 터. 


  -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우연히 본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홍상수 감독, 2016년 작)’에 나오는 대사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만희(김민희 분)는 칸 영화제 출장 중 영화사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로부터 부정직하다는 이유로 해고 된다. 왜 부정직한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남양혜의 연인 소완수(정진영 분)감독과 만희가 술이 취해 같이 잔 걸 남양혜가 알게 된 것이다. 


  만희는 칸 바닷가를 산책하다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난다. 그 여자의 직업은 선생인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다. 만희는 처음 본 클레어에게 자신이 해고된 얘길 하고, 클레어는 만희가 억울하게 해고된 얘기에 공감한다. 


  한편 클레어는 카페에서 만난 소완수감독과 남양혜 대표와 차를 마시며 계속 사진을 찍는다.

  - 당신은 왜 사진을 찍습니까?

  소감독이 묻는다.

  - 뭔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범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클레어가 답한다. 


  69분짜리 영화는 난해한 시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주고 허전하게 끝이 난다. 홍상수 감독의 의도는 ‘진실을 말할 대상이 필요하다’, 혹은 만희의 대사처럼 ‘누구나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 인지도 모르겠다. 


  소감독이 만희의 옷차림(숏팬츠 차림), 다시 말해 겉모습만 보고 천박하다고 질책하고 사라진 후 클레어가 나타나 사진을 찍자, 만희는 참담하게 소리친다. 


  - 찍지 마세요!

  그 순간 카메라는 ‘진실’이 아니라 ‘루머’에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드는 언론일 수도 있다.

카메라는 진실인 동시에 삶을 복기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고, 반대로 진실을 왜곡하는 시선(언론)이기도 하다. 억울한 만희는 대표에게 해고당한 그 노천카페에서 그 때 했던 질문을 혼자 중얼거린다. ‘제가 부정직하다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나름 그 순간을 복기해 보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과 여배우 김민희와의 스캔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스스로의 자의성을 띠게 되어 보는 사람 혹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가 어떤 의도로 이 영화를 찍었든, 내가 건진 건 클레어의 저 대사 한 마디뿐이다. 

  홍상수의 이런 작가적인 면이 비늘처럼 번뜩일 때 우리는 그에게 중독된다. 그가 어떤 스캔들을 일으켜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걸 ‘혜안의 눈’이라 한다. 홍상수의 메타포를 읽어내지 못하는 관객은 짜증이 날 것이다. 어쩜 중간에 보는 걸 포기할 지도 모른다. 가끔은 오락물이 아닌 삶에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영화를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영화들은 ‘영혼의 양식’ 같다. 


  한 권의 철학책을 끙끙거리며 보는 것 보다 이렇게 감독들이 밥상을 다 차려주니, 얼마나 좋은가.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다시 돌아가자. 왜 복기하는 삶이 아름다운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 복기란 바둑에서 한 번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보는 것을 말한다. 바둑처럼, 삶의 순간순간을 복기해야 변할 수 있다. 바둑을 왜 복기하는가? 다음에 잘 하기 위해서다. 하다못해 남자들은 화투를 치다가도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며, ‘아까 니가 흑싸리를 던져 줬어야 내가 끝나는 건데’, 하며 복기하지 않는가. 모든 스포츠도 복기를 통해 변화를 가져온다. 역사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은 복기하지 않는가.   


  부부싸움도 왜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다시 쳐다보면’ 분명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근육질의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애기를 자세하게 들어주는 남자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걸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려면, 발가벗은 자신의 자아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변명하거나 포장하지 않은 알몸의 자아와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이 변화 될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자기 삶의 리더가 될 수 있다.


  가끔 헐렁한 옷에 샌들을 신고 동네 슈퍼에서 먹을 걸 사들고 털레털레 걸어 집으로 올 때면, 언제나 제레미 아이언스가 떠오른다. 조세핀 하트 소설을 영화화한 데미지(루이 말 감독, 1992년 작)의 마지막 장면이다.


  아들의 연인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쉬 분)과 사랑에 빠졌다가 비참한 비극(아들이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추락사하고 만다.)을 맞이한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분). 의사이자 성공한 정치인이었던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혼자 산다. 헐렁한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동네 슈퍼에서 빵과 치즈를 사서 골목길을 털레털레 걸어서 집으로 간다. 난 이 장면이 너무 좋다. 모든 욕망을 다 내려놓은 자의 걸음걸이.


  집 벽에는 아들과 안나와 자신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을 확대해서 붙여 두었다. 수도자처럼 단순하게 살며 매일 그 사진을 바라보는 게 일과다. 아마 스티븐은 죽을 때까지 그 사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신의 삶을 복기할 것이다. 과연 자신은 그 어느 순간 욕망을 멈출 수 없었는가. 과거의 상처가 있는 팜므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자)이랄 수 있는 안나가 자신을 유혹했을 때, 그녀의 상처를 고스란히 자신이 받을 거라고 왜 생각 못했는가, 그녀의 어떤 고혹적인 면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는가. 등등.


  안나는 자신을 사랑하던 친오빠가 자살하는 걸 본 깊은 상처가 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재물로 삼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할퀴거나 파멸시킴으로서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기 때문이다. 안나는 스티븐을 재물로 삼았고, 그는 파멸했고, 그녀는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어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평범하게 산다. 비로소 제목이 왜 ‘데미지(damage, 상처)’인지 안다. 


  삶을 복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스티븐은 죽을 때까지 속죄하는 죄인으로 살 것이다. 삶을 복기해서 더 이상 깨져버린 삶을 어쩌지는 못하지만, 죽을 때 쯤 그의 영혼은 맑아져, 열반을 맛볼지도 모른다.


  복기란 남의 말을 자세히 듣는 것이다. 혹은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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