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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스티브 잡스와 저커버그의 옷

오직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

  얼마 전 SNS에 올라온 저커버그의 옷장을 보는 순간, ‘젊은 날’의 내 옷장을 보는 듯 했다. 아마 사십대까지 난 무채색 옷만 입었던 것 같다. 이십대 때는 흰색과 회색을 입었고 삼사십 대 때는 거의 검정색만 입었다. 


  검정색 터틀넥만 열 장이 넘는다. 물론 열장이 다 똑 같지는 않다. 주로 두 장씩이 같은 재질의 옷이다. 난 옷을 살 때 똑 같은 걸 두 개씩 세 개씩 사는 버릇이 있다. 치마도 똑같은 걸 두 개 사고 바지도 모양과 색상이 똑같은 걸 두 개씩 사야 마음이 놓인다. 속옷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모양과 색깔과 레이스가 다른 걸 선호하는데 비해 난 똑 같은 걸 열 개씩 산다. 신발도 두 개씩 사고 백도 두 개씩 살 때가 있다. 내 친구는 지겹지 않냐고 머리를 흔든다. 난 내가 좋아 하는 것은 절대 싫증 내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고 음식도 마찬가지다. 거의 편집증에 가깝다. 


  내가 찾는 물건이나 화장품 중에는 단종 되는 것들이 많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똑같은 걸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나는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러면 아들은, “엄마가 찾는 것은 다 명품에 가면 있어요. 명품은 한 가지를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똑같은 걸 만들어내거든요.”하고 일러 주었다. 일상생활의 소모품을 명품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 했을 때는 두 개씩 세 개씩 혹은 열 개씩 사두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저커버그는 회색셔츠 아홉 장과 짙은 회색 후드 티 아홉 장이 걸린 옷장을 오픈했다.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렇게 똑같은 걸 입는다고 했다. 그러나 저커버그의 무채색 옷장은 세속적인 욕망과 배고픔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무엇을 더 가지고 싶을 것인가.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건 모두 다 할 수 있을 만큼 부자가 아닌가. 그가 누더기를 걸친들 초라하다고 느낄 것인가.


  하지만 ‘젊은 날’ 내 옷장은 더 높은 이상과 욕망과 갈망과 허기를 숨기는 무채색 ‘갑옷’들로 가득했다. 한 이십년은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닌 것 같다. 아니 아직도 옷의 대부분이 검은 색이 주를 이룬다. 검은 색만 입으면 마음이 고요해 지면서 속에서 알 수 없는 단단함이 작은 돌처럼 자라나 나를 지탱해 주었다. 컬러풀한 세상을 향한 혹은 3초마다 번뇌가 찾아오는 나를 향한 일종의 ‘침묵서원’ 같은 것이기도 했다. 특히 80년대는 유채색 옷을 입는 것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고독을 비범한 자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검정 옷만 입고 다닌 전혜린과는 조금 달랐다고나 할까.


  스티브 잡스의 청바지와 검정색 터틀넥 역시 더 높은 욕망과 갈망과 허기를 숨기는 갑옷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리바이스 청바지 501만 입었고, 검정색 터틀넥은 이세이 미야케 거만 입었고, 신발은 뉴발란스 모델 넘버 992 회색운동화만 신었다. 


  79세로 타계한 앤디 그로브 인텔 회장은 비즈니스 사상가이면서 스티브 잡스의 멘토이기도 했다. 그의 저서 중에 ‘오직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경영자들에겐 경전과 같은 문구지만, 마치 스티브 잡스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편집광의 다른 말은 ‘몰입의 천재’가 아닐까. 

  스티브 잡스가 일본 소니사를 방문했을 때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신기해 아키오 모리타 당시 소니 사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모리타 사장은 전쟁 후 입을 것이 없어 사원들에게 유니폼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소니의 특징으로 발전했고 서로 단결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잡스는 이세이 미야케를 만나 애플 직원들을 위한 디자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애플 직원들은 싫어했고, 잡스 혼자만 자신만의 유니폼으로 검은색 터틀넥을 택했다. 친구가 된 이세이 미야케는 잡스가 평생 입을 검은색 터틀넥 수백 장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건 월터 아이잭슨이 쓴 전기 ‘스티브 잡스’에 나오는 얘기다. 


  시작은 그렇게 미미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허기진 야망을 숨길 수 있는 기가 막힌 갑옷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더 높은 야망을 가진 잡스지만 그는 또한 ‘미니멀리스트’ 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단순하게 생활 했으며 참선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보면 얼마나 ‘더 높은 야망’이 그를 힘들게 했나를 느낄 수 있다.


  내면에 활화산이 들어 앉아 있었을 스티브 잡스가 택한 삶의 방식은 ‘심플(simple)’ 그 자체였다. 한 가지 옷만 입을 것, 미니멀리즘으로 생활할 것, 참선을 할 것 등이었을 것 같다. 검은색 옷은 불기운을 다독여주는 물 기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택한 삶의 방식을 닮고 싶다. 한 가지 옷만 입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거의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줄 안다. 똑같은 옷이 여러 개니까. 미니멀리즘으로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내 오피스텔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불어난 책만 집으로 옮길 뿐이다. 대신 참선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늘 불교 서적들을 가까이 둔다.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내 속에 욕심이 차올랐을 때였다. 그 욕심을 한 줌 들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불교 서적들이었다. 집착과 애착이 강한 성격 탓에 욕심을 한줌 들어내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불교교리책을 읽는 건 아니다. 그때그때 출간되는 불교 책들을 읽는다. 늘 읽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불편할 때면 눈에 띄는 아무 책이나 찾아 읽는다. 그런 책들을 읽고 있으면 참선을 하고난 후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티브 잡스나 저커버그의 극점에 있는 인물이 생각난다. F. 스콧 피츠제랄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와 그의 연인 ‘데이지’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옛 연인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부정한 방법으로 돈은 벌은 개츠비는 그녀의 집 강 건너편에 저택을 사서 매주말 성대한 파티를 연다. 데이지의 사촌 닉의 주선으로 둘은 다시 재회 한다. 사랑하는 여자 데이지를 다시 만날 때의 그 떨림과 설렘을 숨 막히게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좋다.(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우가 주연을 맡은 1976년 작도 훌륭하다.)   


  데이지는 부자가 된 개츠비와 다시 사랑에 빠지고 그의 옷장에서 명품 셔츠들을 보며 눈물까지 흘리며 감동한다. 철저히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에 물들대로 물든 ‘가련한 영혼’의 전형을 보여준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순수한 사랑은 보이지 않고 그의 부와 ‘명품 셔츠’와 겉모습에만 마음이 흔들릴 뿐인 여자다. 시쳇말로 완벽한 ‘된장녀’인 데이지를 위해 인생을 건 도박을 하는 개츠비. 책장을 덮고 나면, 왜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인지 우리는 안다. (꼭 책부터 보고 영화를 보시길 권한다.)  


  개츠비의 옷장 가득한 명품들, 그의 순수한 영혼만큼이나 투명하게 자신이 얼마나 불안하고 허기진 영혼인지를 그대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 사랑에 아프고 허기진 영혼이 우리들 마음을 복잡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바보 같은 개츠비.  


  언제부턴가 유채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마 어설프게나마 세상과 조금 타협하면서일 것이다. 행복이란 일상의 자잘함에서 온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나를 사랑하면서인 것 같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동안 나를 흑백논리에 가두었듯 남들도 그렇게 흑백논리로 단죄했던 것이다. 세상은 컬러풀하고, 소란스럽고, 번잡하고, 수다스러운 법이다. 


  톨레랑스(tolerance)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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