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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길:라 스트라다

부부란 소통불능인, 완전한 타인이다

  어디선가 젤소미나의 테마곡이 흐른다. 젤소미나의 테마곡은 니노 로타가 작곡한 영화 ‘길’의 주제곡이다. 이 멜로디는 오래도록 내 영혼의 한 귀를 잡고 있다가, 슬그머니 잊을 만하면 다시 되살아나곤 했다. 누군가로 인해 마음을 다치거나 외롭고 쓸쓸할 때, 혹은 살아내는 일이 너무 힘겨울 때 이 멜로디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애절하고 한스럽고,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매력이 있다. 또한 때 묻지 않은 한 영혼의 외로움이 아프게 느껴지기도 하는 곡이다.


  영화 길(La Strada)은 이탈리아 감독 페테리코 펠리니가 1954년에 만든 작품이다. 단순하면서도 천진무구한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니 분)는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1만 리라에 곡예사 잠파노(안소니 퀸 분)에게 팔려간다. 잠파노는 오토바이로 포장마차를 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보잘 것 없는 ‘광대’이다.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조수겸 아내로 혹사하면서 예사로 딴 여자를 탐하는 폭력적이고 본능적인 남자다.


  얼마 후, 그들은 한 서커스단에서 외줄타기 곡예사 ‘일 마토’(리차드 베스하트 분)를 만난다. 잠파노는 언제나 바른 소리를 잘하는 마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그와 싸움질을 하게 되어 잠파노는 감옥에 간다. 마토는 젤소미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신의 뜻’을 가르쳐 준다. 젤소미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잠파노를 떠나라고 하지만 그의 곁에 남는 게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잠파노가 출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 뒤 우연히 길에서 마토를 만난 잠파노는 홧김에 그를 죽이고 만다. 그 사건으로 젤소미나는 정신에 병이 든다. 잠파노는 병든 그녀를 버리고 떠난다. 몇 년 후, 늙은 잠파노가 여전히 쇠사슬 끊는 묘기를 부리며 곡예단을 따라다니다 어느 해변에서 젤소미나가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 잠파노는 바닷가에서 무릎을 끓고 길고 긴 울음을 토해낸다.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성(聖)과 속(俗)’을 그린 영화로 본다. ‘성’은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인간을 말하며, ‘속’은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젤소미나는 ‘성’의 영역에, 짐승 같은 잠파노는 말할 것도 없이 ‘속’의 영역에 속한다. ‘줄리에타 마시니’의 백치 연기와 짐승남의 끝판을 보여준 ‘안소니 퀸’의 열연은 우리들 기억 속에 화인처럼 뜨겁게 각인 되어 남아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외줄타기를 하고 음악을 작곡하는 곡예사 겸 광대 ‘일 마토’이다. 그는 성과 속을 넘나드는 ‘예술가’의 상징이다. 세상을 항상 시니컬하게 보는 그는 언제나 죽음을 예견한다. 삶의 비애를 이미 알아차린 예술가다. 예술가에게 사명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일이다. 일 마토는 젤소미나에게 그걸 알게 해 주었다.


  - 개가 사람을 쳐다봤을 때 말을 걸고 싶은 표정, 하지만 말을 못하니까 짖기만 하지.  


  마토는 잠파노를 영혼이 없는 짐승으로 보며 놀려댔다. 예술가는 언제나 그런 반문화적인 속물의 세계에 조소를 보내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는 예술가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젤소미나의 맑은 영혼을 발견하고 그녀를 연민하며, ‘신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던 젤소미나는 자신이 짐승 같은 잠파노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길에서 만난 수녀에게 ‘당신은 당신의 낭군을 따라 떠돌고, 나는 내 낭군인 하나님을 따라 떠돈다’ 라는 말을 들으며 사랑과 인생에 조금씩 눈을 떠간다. 그녀는 이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파노와 결혼해서 사는 게 자신의 삶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녀는 마토에게서 배운 멜로디를 나팔로 불며 외롭고 신산스런 삶을 달랜다. 예술이 없다면 인간의 영혼은 쉴 곳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잠파노가 마토를 죽인 것이다. 


  외줄타기 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들던 마토의 장대가 차 지붕에 매달린 채 역광으로 검게 형체만 보일 때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올라왔다. 삶의 함정과 비애를 이미 알아버린, 성과 속을 넘나들던 예술가는 결국 삶의 복병을 만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젤소미나가 아프자 잠파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가 바라본 젤소미나는 바로 인간이 지닌 ‘영혼’이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영혼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러나 잠파노는 그 영혼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망을 친다. 그녀를 버리고 떠나면서 그래도 그녀의 머리맡에 조금의 돈과 그녀가 불던 나팔을 두고 간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양심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도 ‘짐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가엾은 인간’임을 보여준다.  


  - 난 아무도 필요 없단 말이야.


  만취한 잠파노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를 도와주는 친구마저 좇아버린 후 바닷가로 가서 울음을 토해낸다. 라스트 신이다. 유일하게 젤소미나에게서만 정신적인 사랑을 느껴본 잠파노는 그녀가 죽고 없음을 알고 비로소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이란 인간만이 가지는 영혼의 감정이다. 그녀가 죽음으로 인해 그에게 외로움을, 다시 말해 성(聖)을 가르친 것이다. 


  간간이 잠파노가 젤소미나에게 ‘입 닥쳐!’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행복해 지고 싶어 젤소미나가 잠파노에게 자꾸 말을 걸려고 노력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가부장적이고 귄위적인 아버지와 한없이 순종과 희생으로 한 삶을 살아낸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계모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돌도 되지 못한 아들을 두고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다. 유별난 계모는 자기 자식만 끼고 아버지를 구박했다. 영남고등학교 야간부를 겨우 졸업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 후 분가했고 할아버지는 재산을 반 나누어 주고, 아버지를 따라 나왔다. 그 후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홀로 우리 가족과 살았다. 아버지는 자랄 때 계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 풀었다고 생각한다. 상처받은 영혼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할퀴면서 치유된다. 어머니는 맏아들인 오빠와 종교에 기대어 육십 여 년 신산한 삶을 이겨낸 것이다. 팔순이 넘은 그들은 이제 모든 상처가 회복되어 손잡고 성당을 간다.  


  이 영화도 영혼에 상처가 있는 부부의 이야기다. 잠파노가 젤소미나를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같이 살았다면 잠파노는 젤소미나로 인해 상처가 치유되었을 것이고, 젤소미나는 예술(음악)이나 종교에 기대어 이겨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영화는 부부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완전한 타인’인 채로, ‘의사소통불능’인 채로 살아간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났을 때 비로소 그와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페테리코 펠리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이 영화는 나 자신의 일부이다. 나 자신의 깊은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또한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겉으로는 함께 살면서도 내면에는 서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독의 의도와 아무런 상관없이 각자의 삶과 상처로 인해 각기 다른 장면에서 감동을 받거나 실소를 머금기도 할 것이다. 페테리코 펠리니와 줄리에타 마시니는 부부였다. 그들의 부부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들 부부도 여느 부부들처럼 ‘소통불능’인 채로 한 삶을 살아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명작(名作)이란 시간의 검증을 통과해서, 현재도 우리에게 여전히 인생에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을 말하리라. 


  아, 명작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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