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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내 속에 프리다 칼로가 산다

프리다 칼로를 보고 온 날은 독주를 마셔야 한다

  -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Frida Khalo)는 멕시코의 여성화가다. 1907년 독일인 아버지와 스페인 인디오의 혼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0년 멕시코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혁명이 일어났다. 프리다가 성장하던 시기는 뜨거운 혁명의 시대였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아름답고 똑똑한 소녀로 자랐다. 그녀는 의사가 되려고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인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은 35명)에 진학했다. 당시 멕시코 혁명을 대표하는 천재 미술가 디에고 리베라가 그 학교 강당에 벽화를 그리러 왔다. 프리다는 그 때 처음으로 디에고를 봤다. 화가가 될 마음이 없었던 프리다는 괴팍한 바람둥이 디에고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살에 그녀가 탄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는 대형사고는 그녀의 삶을 바꿔 놓는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친 것이 아니라 부셔졌다.’고 표현했다. 깁스를 한 채 침대에 오랜 시간 누워 지내던 프리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는다.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녀는 자신을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다 사회주의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를 통해 디에고를 만났다. 디에고는 그녀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수차례의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었지만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은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 한 적이 있는 21살이나 많은 디에고와 프리다는 22살에 결혼한다. 그들은 공산당원이 되었고 사회운동을 같이 했다. 그러나 여성편력이 심한 디에고의 외도는 계속되었고, 치명적으로 프리다의 여동생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 질투와 분노 고독과 상실감은 그녀를 괴롭혔다. 그 후 그녀도 남편을 떠나 자유로운 여행과 연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디에고를 증오하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집착한다. 디에고의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만 세 번이나 유산되고 만다. 그녀에게 허락 된 건 오직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다. 

 

  프리다 칼로를 보고 온 날은 독주를 마셔야 한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목도하고 온 날은 몸의 세포가 쌀알처럼 곤두서서 잠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의 대형사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전차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라고. 전차사고는 육체적 고통을, 바람둥이 디에고와의 만남은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녀의 소원은 세 가지였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디에고와 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어쩜 그녀는 그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루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그림은 인간의 숨을 멎게 할 만큼 독특했고, 디에고는 이혼했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고, 죽을 때까지 그녀 곁에 있었다. 그녀가 떠난 후 디에고는 ‘프리다를 향한 사랑이 내 인생의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녀는 민중과 노동자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디에고를 통해 실질적으로 혁명가의 꿈도 이룬 셈이다. (사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혁명가였다.)


  그녀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육체적 고통과 싸우는 전사였으며, 불평등한 사랑과 피 흘리며 투쟁하는 혁명가였으며, 배신당한 ‘사랑의 전당’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제사를 지낸 제사장이었다.


  인간의 고통을 화폭에 그처럼 잘 표현한 화가는 없었다. 그녀의 자화상은 고독한 저격수의 눈빛처럼 우리의 숨을 멎게 한다. 한 생명체가 온 우주와 맞서는 결연한 표정. 외로움으로 똘똘 뭉친 표정. 감히 자신을 침범할 수 없게 딱딱한 갑옷으로 무장한 무표정. 그 속에 한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몸짓.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장하는 그녀는 ‘사랑의 전당’에 제사 지내는 제사장답다. 사랑을 갈구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치장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랑에 빠질만한 사람이 없다고 또한 말한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일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해보지 않았다. 사랑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키 크고 잘생기고 학벌 좋고 돈 많은 남자를 찾는 여자들. 무조건 젊고 이쁜 여자를 찾는 남자들. 가슴으로 사랑하지 않고 머리로, 눈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냥 주는 거다. 내가 주고 나면 저 사람은 내게 주는 게 뭔가를 무의식으로 계산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그 조건들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착각하다 죽으면 또한 나쁘지는 않다. 마취에서 깨어나듯 그 조건들이 사라졌을 때가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삶을 온통 던지는 사랑에 우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사랑을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사랑을 바보짓이라고 할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차타레 부인의 사랑’ ‘데미지’ ‘안나 카레리나’ ‘위대한 개츠비’ ‘테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얼핏 생각나는 소설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하나같이 자신의 삶 전부를 던져 사랑한다. 그들은 우리들 기억 속에서 불멸(不滅)한다. 프리다 칼로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자화상을 보면 고통도 슬픔도 외로움도 재산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응시할 수 있을까. 존재의 아름다움은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먹고 깊어진다. 어쩌면 디에고의 바람기는 프리다에게 신(神)의 재앙인 동시에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그토록 좋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는가 말이다. 민중을 위해 싸운 디에고는 혁명가로 남고 프리다는 예술가로 남았다. 혁명은 짧고 예술은 길다.


  늘 도덕주의자들 땅에서 부당하게 추방당한 것 같던 내 마음은, 그녀를 보고 난후 한 동안 침묵 속에서 지냈다. 그 동안 얼마나 엄살을 부리며 한없이 게으르게 살았는지를 아프게 인식하게 했다. 그녀는 사랑이든 그림이든 한 순간도 불꽃처럼 타오르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육체적 고통조차 불꽃처럼 그녀를 괴롭혔다. 마치 삶 전체가 화형 당하는 여인 같았다. 불꽃 속에서 사랑하고, 불꽃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며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멕시코 전통까지 끌어안은 그녀의 그림은 그 어떤 미술의 범주에도 들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쓰여 있었다. 향년 47세. 그녀는 47년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독으로 점철된 생을 마쳤다. 


  심장에 칼이 퍽 들어오면 인간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프리다’라는 첨예한 칼날이 심장에 푹 꽂히듯, 그녀는 내 입을 닫게 했다. 그녀는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열정’이라는 거대한 미라를 서서히 일어나게 했다. 이윽고 붕대를 풀어헤치고 저벅저벅 내게로 걸어오게 한다. 가까이 다가온 그 미라의 모습은 프리다다. 그녀를 만나고 온 날 미치게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내 속에 프리다 칼로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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