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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콘야에서 울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존재 이유가 없다

  코로나19로 2년 반 동안 막혀 있던 하늘 길이 열리기 무섭게, 겁도 없이 튀르키예(터키)여행을 떠났다. 튀르키예는 유럽의 동남쪽과 아시아의 서남쪽에 있어 동서양 문화가 혼재된 나라다. 북쪽으로 흑해가 있고 남쪽으로 지중해가 있다. 영토는 대한민국의 3.5배 정도이며 인구는 8.300만 명 쯤 된다. 1인당 국민 총생산액은 한국은 3만 불이 넘고 튀르키예는 8.500불 쯤 된다. IMF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이고 튀르키예는 신흥공업국으로 분류 된다.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도들이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공항을 거쳐 두바이의 사막에서 달을 보고 이스탄블로 갔다. 당연히 패키지 투어다. 여행 일정표에 나온 ‘사막’이란 단어와 ‘지중해’라는 단어 때문에 낚였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98, 데이빗 린 감독)’에서 영국 정보 장교 로렌스 역을 맡은 피터 오툴(1차 세계대전 중 중동 지역의 전투에서 아랍 부족의 지원을 받기 위해 그는 아랍지역으로 파견된다)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사막을 좋아하느냐고. 그러자 피터 오툴이 ‘잇즈 클린(It's clean)!'이라고 답한다. 그 짦은 대사는 내게 늘 사막을 그리워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산과 바다는 보았는데, 사막을 본 적이 없었다. 사막은 얼마나 깨끗할까.


  지중해를 그리워한 것 또한 오래 전 보았던 ‘태양은 가득히’와 리메이크 된 ‘리플리’라는 영화 때문이다. 하늘색과 바다색이 같은 지중해. 그런 공간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확장될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이 본 적도 없는 지중해를 그리워했다. 둘 다 보고 왔으니 버킷 리스트 두 개는 해결한 셈이다.   

  잇즈 클린! 정말 사막은 깨끗했다. 내가 생각했던 모래와는 완전히 다른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 게 사막이었다. 실크 같았다. 맨발에 신은 로퍼 안으로 사정없이 들어온 모래의 감촉은 실크 그 자체였다. 일행과 열 발짝만 떨어져도 적요가 가득 귀를 채웠다. 사막의 달이 그리 밝다니. 사막의 달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밝고 우아한 외등이다. 이스탄블로 가는 비행기에서 물티슈로 발과 로퍼 안을 닦았는데, 깜짝 놀랐다. 물티슈가 깨끗했다. 물론 피터 오툴이 이런 깨끗함을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4일차 때, 기암괴석의 카파도키아에서 남쪽 지중해 해변도시 안탈리아로 출발했다. 그 사이에 콘야(Konya)평야가 있고 토로스 산맥이 있었다. 콘야는 ‘양의 가슴’이란 뜻이다. 이스탄블에서 시리아, 이라크에 이르는 대상들이 거쳐 가는 오래된 도시였다.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내해(內海)였는데 1만 년이 지나 물이 마른 후 기름진 평원이 되었다. 근처에 소금호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랬을 것 같다. 가도 가도 밀밭이었다. 


  평야 중간에 문득 문득 흰 천막촌들이 있었다. 시리아 난민들이 수십 년 째 저렇게 산다고 했다. 실크로드 대상들이 묵었다는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 ‘술탄 한’과 지진으로 생겨난 호수 ‘오브룩 한’을 둘러보았다. 그 숙소 앞에는 노숙자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돌조각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땡볕에서 태연하게. 누군가 묻자, 자신은 독일의 고고학자라고 했다. 저런 이들이 역사를 기록하는구나 싶었다. 


  버스로 돌아왔을 때, 버스 앞에는 젓가락처럼 마른 남자아이 세 명이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시리아난민촌 아이들이었다. 12살, 10살, 8살 쯤 되었을까. 어둡고 불안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검은 눈빛의 아이들. 난민촌에서 나고 자랐을 아이들. 가이드가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버릇들이면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계속 손을 벌린다고.


  그냥 버스에 올랐다가 나는 도로 내려서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키가 제일 큰 아이에게 주었다. 10유로짜리와 5유로짜리였다. 22명의 관광객은 아무도 그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 버스가 시동을 걸어 출발하자 세 아이들은 그나마 내가 준 돈을 얻었다는 기쁨에 날아갈듯 행복한 몸짓으로 돌아서서 평야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눈물은 한참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음료수나 사먹을 요량으로 10불짜리 한 장과 5불짜리 한 장과 1불짜리 5장과 10유로와 5유로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내 주머니의 돈을 몽땅 주지 못했다. 그 젓가락처럼 마른 아이들의 벌린 손을 보면서도 달러는 빼고 유로만 준 것이다. 주머니를 다 털어줘도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말이다. 아, 보시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몇 년 전 튀르키예 바닷가에 얼굴을 묻고 죽은 시리아 난민 꼬마(3살, 아일란 쿠르디)가 생각났다. 파란 반바지에 빨간 반팔티셔츠를 입은 꼬마는 버려진 인형처럼 바닷가에 얼굴을 묻고 죽어 있는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언제 적부터 시리아 내전이란 말을 들었는가. 1971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통령 세습독재집권이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 시작은 201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10대 학생들의 낙서에서 비롯되었다. 정부는 그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시리아 전체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수니파(반군)와 시아파계 정부군이 대립하며 내전은 확대되었다. 여기에 아랍권의 수니파와 시아파계 국가들이 반군과 정부군을 각각 지원하며 내전은 더욱 복잡해졌다. 


  부처와 노자와 공자가 온 지 2.500년이 넘었고, 예수가 온 지도 2천 년이 지났건만, 인간은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있다. 모든 전쟁은 영토와 종교전쟁이다. 오히려 영토전쟁만 있었다면 해결이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신(神)에서 갈라진,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영토전쟁이든 종교전쟁이든 모두 위정자들의 권력다툼이다. 이런 다툼이 벌어지면 가장 힘든 건 국민이다. 국가의 본분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본분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국민이 모두 죽어야 전쟁을 멈출 것인가. 튀르키예는 시리아 난민을 150만 명이나 받아주었고, 한국전쟁이 났을 때는 파병도 했었다. 


  지중해를 보고 석회층으로 이뤄진 온천지대 파묵칼레와 로마 유적지인 에페소를 관광하고 이스탄블로 돌아왔다. 1.500만 명이 사는 이스탄블. 카메라만 대면 그림엽서가 되는 풍경과 야경. 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지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푸른빛이 나는 도자기 타일 때문에 사람들이 블루모스크라 부른다. 


  그 옆의 아야 소피아. 성당이었다가 모스크였다가 다시 박물관으로 변한,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의 아야 소피아.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 대성당으로 건설 되었으나, 이후 이슬람교의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다시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건축물도 아름다운 여인처럼 기구한 역사의 파도를 타게 되는구나 싶었다. 


  마지막 날 밤 갈라타교 아래 카페에 앉아 고등어 케밥과 차이를 시켜 놓고 야경을 바라보았다. 어느 영화의 스크린 속으로 쓰윽 들어와 앉은 듯하다. 눈 가는 곳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가. 이런 풍경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난다. 지중해의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그랬다. 지중해의 바람이 내 뺨의 솜털을 어루만질 때 말이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나는 왜 자꾸 은둔자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지. 상처받은 자의 습(習)인가.       

  오스만 제국(1299~1922)은 600여년의 전성기를 누렸다. 1453년 알라의 이름으로 천년의 역사를 지닌 기독교 비잔티움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블)을 접수한다. 이후 이스탄블은 비잔틴문화와 이슬람문화가 융합되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멀티한 건축물을 남겼다. 그 교류와 융합의 흔적은 투르크인 얼굴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잘 생겼다.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생긴 남자가 산악 지프를 운전하며 묘기를 부리고, 1달러 팁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엄청난 자원인 건축물과 유적과 폐허를 팔며 살았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튀르키예공화국이 건립 되었다. 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말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이다. 어느 날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튀르키예는 또 다시 제국을 꿈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을 한 번도 꿈꿔 본 적도 없는,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으면 외국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분단된 동방의 작은 섬나라 같은 대한민국에서 날아온,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인은 주제넘게 조국 걱정은 하지 않고, 남의 나라 걱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고등어 케밥은 손도 대지 않고 차이만 홀짝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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