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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선녀와 나무꾼

나무꾼은 나무를 해야 행복하다

  또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다. 

  옛날 옛날에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한 나무꾼이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을 구해준다. 사슴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의 보답으로 보름달이 떠는 날 폭포로 나가보라고 한다. 그 폭포에는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거라고 일러준다.


  - 그 선녀들의 날개옷 중 하나를 감추세요. 그 날개옷이 없으면 선녀는 하늘나라로 못 올라갑니다. 그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가 나무꾼님의 각시가 될 겁니다. 대신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는 날개옷을 절대 보여주어선 안 됩니다.   


  나무꾼은 사슴이 일러 준대로 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나무꾼과 혼인하여 아이를 둘 낳았다. 그러나 선녀는 매일 밤, 하늘을 쳐다보며 부모님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렸다. 착한 나무꾼은 그런 선녀가 불쌍했다. 나무꾼은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날개옷을 절대 보여 주지 말라는 사슴의 말을 어기고, 아이 둘을 낳은 선녀에게 그만 날개옷을 보여 주고 만다. 선녀는 그 날개옷을 보자마자 입고 아이를 양 손에 끼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다. 그날 이후 나무꾼은 일도 하지 않고, 식음도 전폐하고 매일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왔던 폭포에 나가 앉아 하늘만 쳐다보았다.   


  하늘에 올라간 선녀는 폐인이 되어가는 남편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나라로 올라 올 수가 없다. 선녀는 남편이 하늘나라로 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옥황상제께 백일 동안 매일 눈물로 읍소했다. 옥황상제는 그 막내딸의 간청에 감응하여 보름달이 뜰 때 두레박을 내려 보내게 허락한다. 

  그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온 나무꾼은 선녀를 다시 만나 아이 둘을 더 낳고 잘 사는 듯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나무꾼은 먹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일하지 않아도 금은보화가 가득하고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밥을 먹고, 사랑하는 가족과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놀기만 하는데도 그는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다. 


  선녀는 나무꾼에게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나무꾼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선녀는 다시 옥황상제에게 나무꾼이 한번만 어머니를 뵙고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읍소한다. 선녀는 옥황상제가 막내딸인 자신의 눈물에 약하다는 걸 안다. 


  하늘나라에 온 인간은 지상으로 내려갈 수가 없다. 그러나 매일 눈물로 간청하는 막내딸이 가여워 옥황상제는 천마를 내어준다. 나무꾼은 천마를 타고 자신이 살던 산골 집으로 향했다. 새벽이었는데 어머니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나라에 간 아들이 무탈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천지신명에게 빌고 있었다. 


  나무꾼은 눈물이 쏟아졌다. 천마는 나무꾼 집 위를 천천히 돌아 하늘로 향했다. 그 때 나무꾼의 눈에 자신이 매일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 지던 지게가 보였다. 순간 나무꾼은 주저  없이 천마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땅에 닿으면 다시 천마에 올라탈 수 없다. 천마는 유유히 하늘로 사라졌다. 


  나무꾼은 그 길로 어머니에게 큰 절을 하고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꾼은 나무를 하며 오래도록 어머니랑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을 준다. ‘나무꾼은 나무를 해야 행복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스토리를 만들어 보았다. 원래 내가 어릴 때 알고 있던 ‘선녀와 나무꾼’ 전래동화는 두레박을 타고 올라간 나무꾼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가 끝이었다. 말하자면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커서 본 어느 책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났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천마를 타고 내려온 나무꾼은 어머니가 끓여준 팥죽을 먹다가 뜨거운 팥죽이 천마의 발등에 떨어지자 천마가 놀라는 바람에 나무꾼은 땅에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나무꾼은 지상에서 홀로 살다가 죽은 뒤 수탉이 되었다고 했다. 수탉이 된 나무꾼은 하늘나라의 아내와 자식이 그리워 매일 아침 지붕에 올라가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다는 것이다.


  결국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는 신분격차(하늘과 땅)를 뛰어넘지 못한 슬픈 사랑이야기의 원형인 셈이다. 

가끔 그 어머니는 왜 하필 뜨거운 팥죽을 끓여 먹였을까, 생각했다. 어쩜 부부보다 효(孝)사상에 더 무게를 두던 시절의 구전설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꾼이 지게를 보자마자 천마에서 뛰어 내린다는 건 얼마나 통쾌한가. 아내나 자식이나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정체성을 위한 삶의 선택이 아닌가.


  아무튼 나무꾼은 나무를 해야 즐겁다. 나무를 할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 나무꾼은 불행했다. 너무 일찍 정년을 맞이한 이 시대의 모든 나무꾼(여자 나무꾼도 있다.)들은 불행하다. 그러나 나이 탓하지 말고, 나라 탓하지 말고, 복지에 기댈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유기하지 말고, 무엇이든 배워서 경제활동을 하는 행복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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