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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의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1-2

욕망이란 새벽 두 시에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7

  판화가 전공인 후배의 그림은 밝고 강렬해져 있었다. 너로서는 파리에서 돌아와 곧바로 연, 첫 번째 개인전의 신화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던 청회색 톤의 그림이 좋았었다. 그러나 후배는 점점 더 대담하고 현란한 색조를 구사했다. 

  입구에 화랑 아가씨가 정물처럼 앉아 있고, 중앙 소파에 흰옷을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을 뿐, 전시장을 돌며 그림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배는 네가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충분히 감상하도록 뒷짐지고 두어 걸음 떨어져 조용히 따라다녔다.    

  첫눈 오는 날, 볼레로가 흐르는 화랑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자니, 넌 갑자기 귀족이 된 기분이었다. 너는 그림들 중에서 제일 소품에 해당하는 십 호 크기의 판화를 네가 사겠다고 화랑아가씨에게 말했다. 그 판화는 코발트빛을 배경으로 검은빛과 흰빛이 뒤섞여 얼핏 피아노 건반이 용트림을 하며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은 그림이었다. 후배의 그림 중, 붉은빛이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그림이었다.    화랑아가씨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 그림은 이미 다 팔렸다고 말했다. 네가 후배를 쳐다보자, 중앙 소파에 앉아 있는 흰옷 입은 남자를 눈짓하며, 저 분이 마지막으로 사셨다고 했다. 네가 약간 실망하자, 후배는 배시시 웃으며 작업실에 한 점이 더 있다고 말했다. 판화 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후배가 화랑아가씨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는지 삼십프로나 에누리 해 주었다.

   - 언니, 차 한잔 해.

  후배는 너를 중앙 소파가 있는 곳으로 끌어 당겼다. 그 곳에는 흰 가운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낀, 창백하고 조용한 남자, k가 앉아 있었다. 한 눈에 k의 직업이 의사임을 알 수 있었다. 

  - 선생님, 제 선배언니예요. 유능한 번역가고, 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성입니다.

  후배는 활달하게 너를 소개했다. 

  너는 안녕하세요, 하고 목례를 했다. k는 안경 너머로 네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하고 자리를 권했다. 그 때, k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참으로 이상한 일이 너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너는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다소 심심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던 네 일상의 질서 속으로 우주의 어느 뜨거운 행성 한 조각이 우연히, 그러나 맹렬히 날아와 박히는걸 명징하게 느꼈다. 

  - 언니, 이 분은 이 건물 이층에서 일하시는 분이야. 내 전시회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신 분이기도 하고.

  후배는 벌써 그 특유의 사교술로 상당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너는 k와 마주앉아 있는 게 편하지가 않았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무릎을 붙여야 할지, 편하게 약간 떼 놓아야할지 갈등을 겪을 정도로 모든 행동이 의식되었다. 그런 네 자신이 낯설고 어색했다. 등에 땀이 배였다.

  -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어 매일 기다렸지요.      

  k의 느닷없는 말에 너는 후배를 돌아보았다. 후배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필경 어떤 모사(某事)를 꾸민 악동의 웃음이었다.

  - 별 얘기 안 했어. 사복 입은 수녀 같은 선배 언니가 있다는 말밖에 안 했어.

  후배는 일어나 차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 k는 나른한 몸짓으로 앞 탁자에 놓인, 자신이 마시던 녹차를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할 것 같았지만 전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릎에서 맞잡고 있는 손안에 속절없이 식은땀이 묻어 났다. k 또한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 동작이 너무나 고요해 거의 아름답게까지 보였다.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k의 얼굴에 묻어나던 고뇌의 빛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면 너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아픔이나 외로움 혹은 삶의 함정과 허무와 비애를 눈치채 버린 사람 특유의 쓸쓸함과 고요함이었는지도. 

  눈에 콩깍지가 씌일려고 그랬겠지만, 어딘지 마음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황폐한 분위기와 얼굴의 묘한 그늘이 네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장에 k를 따뜻하게 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너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버린 후, 네 마음은 인두에 지져진 듯 그 어떤 인간에게도 연민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은 연민에서부터 출발한다. 

  특히 너는, 네 모성본능을 건드리지 않으면 사랑이 불가능한 타입이었다. 

  - 저랑 같은 그림을 고르셨군요.

  k가 말했다. 

  k의 목소리는 금방 구워낸 말랑한 빵의 속살처럼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는 네 몸 속으로 파고들어 네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현을 건드렸다. 너는 순간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너는 k 몰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분명 k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네 가슴에 날아와 박힌 뜨거운 행성 한 조각이 꿈틀거려 네 몸 전체에 열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낯선 남자 앞에 오랜만에 마주앉아 수줍고 어줍잖아 그런 줄 알았다.  

  - 네, 전 붉은 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 그래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랑 취향이 많이 닮은 것 같군요.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면, 제가 저녁을 살 수 있는 영광을 주셨으면 하는데요. 어때요?  

  넌 너무나 뜻밖이라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 때 k의 가운 윗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이 울렸고, 후배가 찻잔을 들고 돌아왔다. k는 알았어. 금방 올라갈게, 라고 짧게 말하곤 플립을 접었다.

  -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들 퇴근시키고 내려오겠습니다.

  k는 침착한 어조로, 예의 바르게 또한 은근한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며 말하곤 일어섰다. 

  너는 후배에게 저 분과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냐고 물었다. 후배는 아니, 왜?, 라고 도로 반문했다. 

  - 저녁 같이 하자는데?

  그러자 후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 정말? 야, 언니 축하해!

  너는 후배의 말뜻을 얼른 알아들을 수 없어 멀뚱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 바보같이, 언니에게 데이트 신청한 거야.

  - 너랑 셋이 먹는 게 아니고?

  - 당연하지. 매일 화랑에 내려와 잠깐씩 앉아 있다 올라가면서도, 내겐 한번도 저녁 먹자는 말 없었어. 좋겠다. 내가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언니가 이렇게 강력한 라이벌인줄 몰랐네.

  후배는 질투 섞인, 그러나 애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 k와 저녁 먹을 자신이 없는 너는 후배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날 후배는 선약이 있다며 기어이 빠졌다. 넌 후배의 마음씀을 이미 알고 있었다. 후배는 네게 윙크를 해주곤 사라졌다. 너는 그 윙크를 보는 순간, 이 모든 게 어쩌면 후배의 계획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그 때 너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는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너는 k를 네가 선택한 것이다. 

  k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k를 처음 봤을 때, 네 내부에서 울려 퍼진 소리가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소린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랑이 등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때의 그 눈빛은 천박한 욕망의 시선이었고, 그 소리는 k의 시선으로 인해 네 속에 잠자고 있던 욕망이 알을 깨고 나오는 소리였음을 너는 뒤늦게 깨달았다. 순진한 너는 그 욕망의 시선과 무구한 사랑의 시선을 구별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은 네게 있는 것이다.

  8 

  k는 결혼한 남자였고 너 보다 일곱 살이 많았다. 그는 마흔 살이었다. 그가 마흔 살이라는데 너는 놀랐다. k에게서는 아직도 청년의 이미지가 남아 있어 나이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몇 년 전 네가 번역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화제가 궁하지는 않았다. k는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였다. 누군가를 만나서, 특히 남자를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일은 언제나 네게 진땀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k와는 처음부터 오래도록 알아왔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느 날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친숙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널 발견했을 때, 너는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변화된 것인지 k가 고도의 사교술을 발휘해 네가 전혀 어색해하지 않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k와 마주 앉아 있으면 어둡고, 습하고, 황량하고, 외롭던 심연에 아늑한 등불을 밝힌 듯, 즐겁고 행복하고 따뜻했다. 너는 불행하게도 그런 감정을 한번도 맛보지 못했었다.

  k는 네게 향수를 선물하며 자기를 만날 땐, 이 향수를 뿌리고 오라고 했다. 어머니가 향수를 뿌릴 때마다 경멸에 찬 눈으로 노려보다, 창문을 와르륵 열어 젖이곤 하던 네가 샤워를 한 후 향수를 뿌렸다. k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너는 뭐든지 참고 견디며 할 수 있었다. 넌 이미 k의 손가락 하나에도 반응했다. 

  어머니의 향수 뿌리는 법은 독특했다. 보통 사람들이 귀 뒤나 손목 안쪽 같은 몸에 뿌리는데 비해 어머니는 향수를 허공에 뿌린 후, 그 아래 알몸으로 서 있었다. 

  - 이렇게 해야 향이 온 몸에 은은하게 스며든단다. 

  너는 어머니가 하던 것처럼 그렇게 허공에 향수를 뿌린 후, 알몸으로 그 아래 서 있었다.

  네가 k를 완전히 받아들이는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우주 속으로 사라진 후 삼 년 동안, 남자와 사랑을 나눠 보기는커녕 데이트를 해본 적조차 없는 너는 모든 것에 서툴기 짝이 없었다. 또한 결혼한 남자와의 사랑이란 상상도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k는 너의 자유롭지 못한 사고를 빗대어, 왜 갑옷을 껴입고 사느냐고 했다. 후배 말대로 사복 입은 수도자 같다고도 했다.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샌들에 거울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고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공간에서 침묵의 생활을 하는 가르멜 수녀원을 너는 잠시 떠올렸다. 네 생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사랑도 연습이 필요해. 넌 연습부족으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야. 긴장을 풀어.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 물위에 누워도 빠지지 않는 법이야.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잔지 아니?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눈이 어두워 너 같은 여인을 발견하지 못한 거야. 아니지, 네가 너무 칩거했기 때문 일거야. 광장엘 나와야 사람을 만나지. 넌 네 자신을 잘 모르겠지만, 넌 아주 화려하고 열정적인 여자야. 널 안을 때마다 공작새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내 귀에 가득 울려 퍼지는 것 같지...... 네 생각을 할 때마다 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온 몸이 발광체처럼 파랗게 타오르는 것 같아. 아, 네가 그리워 미치겠어. 제발 날 좀 쓰다듬어 줘. 널 껴안고 잠들고 싶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k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퇴폐적이었다. 생각하면 그런 야들야들하고 달콤한 말을 잘하는 치는 필경 바람둥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너는 싫지 않았고, k가 바람둥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9

  너는 이미 청맹과니가 되어 있었다. 눈이 멀어지지 않는 사랑도 있던가? 눈먼 사랑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비즈니스나 로비리스트들의 몫일 터이다. 눈이 멀어진다는 것은 상대의 인생관이나 사랑관이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 알 겨를도 없이, 그대로 사랑에 빠져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일단 눈이 멀어지고 나면 청맹과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다. 

  k는 네 속에 잠자고 있던, 아니 오래 전에 이미 미라가 되어버린 성욕(性慾)을 일으켜 세워 세상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게 했다. 어쩜 널 성(性)에 눈뜨게 한 공(功)은 인정해야할 지도 모른다.     

  k의 매력은 말의 성찬으로 네 성감대를 쿡쿡 건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면 누구나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게 연출에 의해서건 아니건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k는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k의 병원은 늘 여자환자들로 들끓었다. 외모도 재능이라면 k의 재능은 탁월하다. 적어도 네 눈에는 그랬다.

  종일 수술로 지쳐 창백한 얼굴에 푸르게 자란 턱수염과 까만 눈썹, 단정한 입술, 간간이 안경 너머로 네 눈을 지그시 바라볼 때의 그 그늘진 눈빛. 그 눈빛은 네 몸을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 옆모습은 어떤가. 이마에서 시작해 턱으로 이어지는 프로필은 고뇌에 찬 청년미륵처럼 아름다웠다. 문득문득 눈을 내리깔  때마다 속 쌍꺼풀에 실린 피로는 촉촉이 젖은 우수만 같아, 덧없이 나이만 먹은 네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이란 덧없는 인간의 약속일 뿐이다.  

  서른 세 살의 너는 사춘기 소녀처럼 사랑에 빠졌다. k는 네 어머니처럼 끝없는 연애의 릴레이를 계속해야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연애중독자’였다. 그러나 너를 만날 당시, K는 자신의 사생활이 너무나 역겨워 잠시 근신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연애중독자가 연애를 끊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네 눈에는 그토록 쓸쓸해 보였는지 모른다.      

 

 10  

  k를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지금 당장 너를 만나야겠다고 전화가 왔다. 지친 듯한 k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수리에서부터 내리꽂히는 알 수 없는 전류가 네 몸 중앙을 관통했다. 너는 잠시 표본 된 나비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속에서부터 화르륵 밀려오는 거센 떨림은 네 입술을 타게 했다. 이런 감정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너는 현기증이 일었다. k를 만난 이후 너는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온 몸의 세포가 극도로 달떠 있어 계속 선잠에 시달려야 했다. 너 또한 당장 k를 만나 이 감정을 빨리 희석시켜야만 네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 여섯 시 십 분이었다. k는 여섯 시에 보통 퇴근한다. 어디냐고 묻자 k는 병원이라고 했다. 너는 그럼 병원으로 갈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너는 허둥대며 샤워를 하고 화장을 했다. 이 옷 저 옷을 입어 보느라 침대 위는 난장판이었다. 이미 k의 촉수는 너의 성감대 깊숙이 파고들어 너를 젖어들게 했다. 

  너는 숨이 차 올라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참에서 잠시 숨을 고루었다. 불이 꺼져 있는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고, 문이 반쯤 열린 진료실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새어나온 불빛은 대기실 바닥에 긴 삼각형을 만들었다. 

  k는 초록색 수술모와 수술복을 그대로 입은 채, 등 높은 가죽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네가 들어서자 무겁게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 너를 안으며, 아, 오늘 하루는 너무 힘겨웠어, 하고 중얼거렸다. 너는 참으로 오랜만에 네게 기대오는 남자의 냄새와 무게와 실체감으로 몸을 떨었다. 

  k는 순식간에 네 코트를 젖히고 어린아이처럼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졌다. 네가 본능적으로 k를 밀어내자, k는 더욱 완강히 껴안으며 네게 키스를 했다. 혀뿌리가 뽑힐 것 같은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너는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 해, k의 목을 안았다. 네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침샘에서 침이 물총처럼 뿜어져 나왔다. 

  k는 네 손을 잡고 회복실이라고 팻말이 붙은 방으로 데려갔다. 회복실은 두 평이나 될까한 방에 일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k는 몹시 서둘렀다. 자신의 수술모와 수술복을 벗어 던지기가 무섭게 네 옷을 벗겼다. 이미 젖어 있는 너도 덩달아 마음이 다급했다. k는 격렬하게 네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둘의 동작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는데, 같은 동작이 반복될수록 어디선가 돌쩌귀 소리가 들려 몰입을 방해했다. k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 소리도 멈추었다. k가 움직이자 다시 찌걱찌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k는 소리의 진원지를 알아차리고 손을 가까스로 뻗어(조금만 팔이 짧았더라면 혹은 그 소리의 진원지가 일 센티미터만 더 멀었더라면 k의 페니스는 네 몸에서 빠져나와야만 했을 것이다), 침대 모서리에 꽂혀 있는 스테인리스 막대를 힘들여 뽑아내었다. 그것은 링거병을 걸 수 있도록 만든 티자형 스테인리스 막대였다. 스테인리스 막대를 뽑아 창가 턱에 놓아둔 후 k는 다시 피스톤 운동을 계속했다.

  너는 그 날 섹스를 하며 울었다. 

  몸과 마음을 닫아걸고 ‘터미네이트’처럼 살은 지가 삼 년쯤 되었다. 어머니가 자살한 뒤, 너는 만나던 남자와 헤어졌다.

  11

  그 날 이후, 너는 k와 서울의 러브호텔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러브호텔이란 러브호텔은 안 가본 데가 없을 것이다. k의 철칙 중 하나는 절대 독신녀와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였다. 한마디로 골치 아프다는 것이다. 유부녀는 남편이라는 안전핀이 있어, 열정이 식었을 때 절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는데 비해, 혼자 사는 여자들은 몇 번 같이 자기만 하면, 이혼하고 자기와 같이 살자고 울고불고 귀찮게 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잃을 것이 없는 여자와는 사귀지 않는다고 했다. 

  - 그래야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더티하게 끝나지 않아.

  그러면 나는 결혼한 여잔 줄 알았냐고 네가 물었더니, k는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게 마련이라며 넌 이지적이고 자존심이 강해 절대 다른 보통의 독신녀들처럼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것 같거든, 하고 말했다. 넌 바람둥이의 그 역겨운 말을 들으면서도 좀 전 네 속에서 너와 하나가 되기 위해(처음에는 그랬겠지만 나중에는 단순히 사정하기 위해) 애원하듯 요동치던, k의 미끈거리는 페니스를 만지고 있었다.

  k가 늘 두리번거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넌 k의 전화 한 통화에 네 생(生)을 거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k는 너의 집에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한번은 네가 우리 집에 갈래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k는 네 집에 들랑거리기 시작하면, 나 정말 이혼하고 싶을지도 몰라, 하고 널 너무나 사랑한다는 의미의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미 그때 이별은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신변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속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k는 네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어떤 식으로 커피를 뽑아 먹는지, 어떤 커피 잔에 커피를 마시는지, 어떤 색의 침대커버를 써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네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k는 네 육체만 필요했는 지 모른다.  

  집안에 그의 흔적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12

  k의 연기는 천부적이다. 어쩌면 널 처음 만나는 날도 널 유혹하기 위해 연기를 한 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온 몸에 쓸쓸함을 휘장처럼 두르고, 두 눈에 가득 비애와 허무를 담고 너로 하여금 연민을 품게 만드는 연기. k는 널 보는 순간 단번에 너의 아킬레스건을 간파할 줄 아는 프로였다. 너의 아킬레스건은 모성본능을 건드리는 것이었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네 후배는 달랐다. 후배는 어린아이처럼 기대오거나 여자처럼 나긋나긋한 남자는 딱 질색이라고 했다. 

  - 남자는 모름지기 수컷 냄새가 나야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난 끌려. 정글의 법칙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말야...... 나긋나긋한 건 침대 위에서나 필요하지.

  후배의 남성관은 확고했다. 말하자면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남자에게 그녀는 끌리는 것이다. 여러 남자와 교제하며 저절로 터득한 노하우가 있는지 그녀에겐 늘 멋진 애인이 있었다. 싱글이든 유부남이든 그녀는 상관없었다. 독신주의자도 아니면서 그냥 혼자 사는 너와는 반대로 그녀는 결혼 따윈 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하겠다는 독신주의자였다.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 한 남자가 끝나면 얼마 안 있어 다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그녀와 연애를 시작했다. 

  하긴 후배의 연애관 또한 너와는 달랐다. 사랑에 목숨 걸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더 이상 성욕이 일지 않는 남자와는 만나지 않았다. 후배의 말을 빌리자면, 성욕이 일지 않는 남자를 만나는 건 시간 낭비일뿐더러, 신성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선언했다. 그녀는 정신적인 사랑은 미성년자나 할 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열정이 식은 남자와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후배는 어쩌면 상처받기가 두려운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보호색을 치듯 상대 보다 먼저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리라. 후배의 마음은 이미 끝났는데, 상대는 아직 열정이 남아 있어 그녀에게 집착할 때면, 후배는 동정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이 큰 상처 없이 끝나질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후배가 먼저 끈을 놓아도 상처받기는 마찬가진지, 그러고 나면 후배는 한 동안 작업실에서 칩거하며 작품에 몰두하곤 했다. 후배야말로 비열한 바람둥이가 아니라, 진정한 연애의 고수 혹은 연애지상주의자인 셈이었다.

  후배는 일 년에 한 차례씩 개인전을 가진다. 개인전으로 마련한 돈으로 그녀는 파리행 비행기 표를 사서 토마스를 만나고 돌아온다. 동거하던 스위스 남자는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올 즈음, 그도 귀국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의 후배의 눈빛이 더없이 쓸쓸해 보여, 그와 결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13  

  눈은 미친 듯이 휘몰아치며 내린다.  

  잘 잤니? 혹은 일어났니? 오전 열 한시 십 분이면 걸려오는 모닝콜. 너는 잠에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목소리로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곤 했다. 너는 온 몸을 혀로 핥는 듯한 k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살갗이 쓰라리다. k가 전화를 아침저녁으로 하던 때는, k를 만나지 않아도 늘 k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k는 너를 중심으로 도는 소행성처럼 네게 모든 걸 보고했으므로, 지금 이 시간쯤, k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가슴 편안하고 따뜻해져 네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는 언제부턴가 k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너는 일을 못한 지가 한참 된다.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켜두지만 정작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출판사와의 계약 

날짜를 처음으로 지키지 못할 것이다.

  너는 거실 소파에 앉아 몸을 골프 공처럼 딴딴하게 말고 그리움을 견딘다. 그리움이 아픔이란 걸 너는 처음으로 경험한다. k를 그리워하는 게 단순한 성욕(性慾)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자, 너는 네 자신이 싫어 욕지기가 난다.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은 섹스가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k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충분한 믿음이 있을 땐, 이처럼 강렬한 성욕이 일지 않았다. k와 푸닥거리를 하듯, 잔치를 벌리듯, 질펀하게, 몸과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미끈거리고, 입에서 훅훅 단내가 나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척척 들러붙는 섹스를 하고 나면, 이 모든 그리움이, 고통이, 씻은 듯이 나을 것도 같다. 어쩌면 k는 다시 너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좁고, 깊고, 지독하게 어두운 크레바스에 끼인 듯하다. k를 향한 몸과 마음이 멈춰지지가 않는다. 아, 어머니도 이랬겠구나. 어머니도 이랬겠구나. 드레스처럼 치렁치렁한 흰 잠옷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가슴에 독화살이 박힌 짐승처럼 그리움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넋이 나간 듯 집안을 돌아다니던 어머니가 눈앞에 보인다. 그 뒤를 ‘금달레’처럼 머리를 산발하고, 붉은 맨발로, 역시 넋이 나간 듯 퀭한 눈으로 눈물을 철철 흘리며, 깡마른 네가 따라다닌다. 허깨비 같은 두 모녀는 하염없이 집안을 돌아다닌다. 안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건넌방으로...... 발이 시리다. 시린 발을 너는 두 손으로 꼭 감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망토를 한 거대한 악마가 맨발로 돌아다니는 네 몸에 손을 쑥, 집어넣어 펄떡이는 심장을 끄집어낸다. 악마는 껄껄 웃으며 면도날로 쓰윽 네 심장을 긋는다. 악마의 손에 들려 있는 네 심장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너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댄다. 눈앞의 환영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진정 이건 악몽인 것 같다. 빨리 꿈에서 깨어났으면.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k가 전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너는 안다. 

  너는 십일 층 베란다로 나가 덧창을 열고, 방충망을 열고 바깥으로 상체를 내민다. 눈발의 난무는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몸짓 같다. 그 몸짓은 세상의 물체와 경계를 모두 지워버리고 네 얼굴에 닿아 물이 된다. 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은빛 눈의 난무뿐이다. 심호흡을 한다. 네 입 속으로 빨려든 눈발도 물이 된다. 너는 자꾸자꾸 눈을 먹는다. 조금 시원하다. 

  허공에 난무하는 눈발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자니, 그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너도 눈발이 되고 싶은 충동이 인다. 눈발이 되어 너도 어디 따뜻한 곳에 닿아 물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햇빛의 등을 타고 허공으로 사라지고 싶다. 

  너는 어디 올라설 데가 없나 두리번거린다. 오른편에 에어컨 실외기가 비닐커버를 뒤집어선 채 놓여 있다. 너는 그 실외기 위로 올라서서 다시 덧 창턱에 한 발을 올려놓는다. 이제 한 발마저 끌어올린 다음 눈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된다. 몸의 중심을 잡으려 오른쪽 덧창을 잡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너는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가슴이 쿵쿵 뛴다. 현기증을 가라앉히려 너는 잠시 전화기에 손을 얹고 벨소리가 두 번 더 울릴 때까지 기다린다.  

  14  

  “여보세요?”

  네 목소리는 외로움과 두려움과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 불안정하다.

  “언니, 나!” 

  씩씩한 후배의 목소리다. 

  너는 실망과 또한 안도감으로 전화기를 쥔 채 쪼그리고 앉는다. 

  “목소리가 다 죽어가네. 내가 저승사자라도 언니부터 끌고 가겠다. 점심 먹었어?” 

  “아니.” 

  “보나마나 뻔해. 청승맞게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만 쳐다보고 있었지?”      “그래.” 

  “나와. 나랑 냉면이나 먹자.” 

  “싫어.” 

  “그럼 내가 갈까? 밥 줄래?” 

  “싫어.” 

  “아이고, 그 놈의 순정딱지 한번 혹독하게 떼네. 밀폐된 작고 검은 상자에 갇힌 것 같지?” 

  “응.” 

  “숨도 못 쉬고 죽을 것 같지?” 

  “응. 넌 어떻게 그렇게 잘도 아니?” 

  “그 과정 없이 지금의 내가 있겠어? 그 사람 안 만난 지 얼마나 됐어?” 

  “한 달.” 

  “아직 멀었다. 나는 암흑기처럼 빛과 시간과 소리가 딱 차단되었다가, 어느 날 까치 울음소리에 정신이 들어 달력을 보니 석 달이 지나 있었어. 돌아보면 내 인생에 있어 한 순간 불이 끄진 암전상태였지. 언니도 두 달만 더 견디면 어느 날 종달새 울음소리가 문득 들릴 거야.” 

  “그 사람 아직 내게 끝내자는 말 안 했어.” 

  “그래?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 벌써 언니에게서 떠났어. 마음이란 강물 같아,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마음과 물과 바람은 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르잖아. 무엇으로 잡겠어? 가끔 통화하는 건 관성의 법칙 때문이라구. 아니면 언니를 놓기에는 좀 아까울 수도 있을 거야. 어디 가서 언니 만한 여자를 만나겠어? 그 인간 좀 알아보니까, 형편없는 바람둥이더라. 그런 줄 알았으면 언니를 소개시켜주지 않는 건데. 병원에 찾아오는 돈 많고 골빈 여자들 비위 슬슬 맞춰 환자를 물고 오도록 한다는 거야. 그러니 환자가 그렇게 많지. 하기야 그런 인간이 언니에게 뭐 덕볼게 있다고 이년간이나 만났겠어? 어쩌면 언니에겐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한다고 희망을 품진 마쇼.” 

  “넌 왜 그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 말하니?” 

  “비겁하잖아. 싫어졌으면 싫어졌다. 애인이 생겼으면 애인이 생겼다, 정직하게 말해줘야지. 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네가 알아서 내게서 떠나든지, 아니면 내가 전화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든지 선택하라는 식이잖아. 하기야 그것도 초보일 때나 하는 소리지. 연애박사가 되면, 이쯤 되면 벌써 종치고 막 내렸기 때문에 절대 미련 갖지 않아. 나 같으면 다른 사람 만나겠다. 한달 혹은 두 달 안에 분명 전화가 올 거야. 그러면 능청스럽게 잘 지내냐고, 나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 그러면 잘하면 친구가 될 수도 있거든. 친구가 되는 것도 괜찮아. 가끔 몸으로 대화하는 친구, 혹은 정신만 비비는 친구...... 언니, 내 말 듣고 있어?”

  “응......”

  “지금은 내가 무슨 얘길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사랑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실연도 다른 방식으로 겪겠지. 내 조언이 먹혀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의 추악한 뒷모습을 끝까지 다 봐야 끈을 놓을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끈을 놓을 수는 없을 거유. 너무 단칼에 끝내려고 하지마. 언니하고 싶은 대로 해. 전화하고 싶으면 전화하고, 만나고 싶으면 찾아가서 일분이라도 얼굴을 보고 돌아와. 그 사람의 냉랭한 홀대를 받고 돌아오면 언니 마음 접는데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 사람이 언니에게 대한만큼 그만큼 서운하고 배신감을 느끼겠지. 그러면 그 만큼 언니 마음도 뜰 테니까. 내 말 듣고 있지?”

  “응......” 

  “그렇게 몇 번이고 하다보면 쌓였던 정 모래알처럼 무너져, 어느 날 파도에 씻겨 사라지게 돼 있어.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하지. 어느 햇살 밝은 날 아침 눈을 뜨면, 마음이 너무나 홀가분해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 허전하고 평온한 날이 올 거야. 언니가 그 사람과의 좋았던 시간을 간직하고 싶으면 그만큼 고통을 감수해야해. 아름다운 추억은 아무에게나 선물하지 않아. 지금 언니가 고문당하는 듯한 이별의 순간을 얼마나 잘 참아내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덜 훼손되겠지. 선택은 언제나 본인이 하는 거니까,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해서 끝장을 보든지, 삼 개월쯤 걸리는 암흑기을 견뎌 가슴에 보석상자 하나를 간직하든지 언니 마음대로 해.” 

  “넌 어느 쪽을 택했는데?” 

  “나? 나야 끝장을 봤지. 그러고 나니 너무 황폐해지더라...... 그러나 지금은 안 그래, 절대. 황폐한 거 싫어. 애인관계가 끝나면 그냥 친구로도 잘 지내. 그런데 한국에는 그만한 의식을 가진 사람 만나기가 힘드네. 나도 요즘 그 사람과 힘들어. 나는 아직 아닌데 그쪽이 끝내고 싶은가봐. 상처 깊어지기 전에 나도 얼른 마음 수습해야지. 늘 겪는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참 고달프네......” 

  후배답지 않게 한숨소리가 들린다. 후배도 이번 연애는 힘든가 보다. 연애에서 힘든 쪽은 늘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는 아귀처럼 변해 상대를 질리게 하기 십상이다. 후배는 한참을 더 떠들어대더니 배고파 죽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15

  너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냉장고 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던 너는 허리를 굽혀 캔맥주 하나를 집어든다. 오래도록 냉장고에 보관된 맥주는 아주 차다. 너는 단숨에 반 이상을 마신다. 빈속에 마신 맥주는 빠르게 네 몸의 모세혈관을 타고 흐른다. 

  너는 시계를 본다. 수술을 끝낸 k가 점심을 먹으러 나와 있을 시간이다. 간호사를 통하지 않고 바로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과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뿐이다. k는 그 시간에만 휴대폰을 켜둔다. 일단 집에 들어가면 k와는 통신 두절이다.

  간호사가 네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전화를 이런 식으로 따돌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때 너는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왔는가. k가 네게 빠져 있을 때,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는 k의 전화가 약간 지겨워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은 적도 있었다. k는 네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낱낱이 다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심지어 은행에 공과금 내러 가는 것은 물론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알아야 했다. 

  집에서 일을 하는 너의 생활반경이란 손바닥 안처럼 빤하다. 오전 늦게 일어나 커피와 우유를 일대 이로 섞은 모닝커피와 사과를 먹으며 세 개의 조간 신문을 찬찬히 본 후,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는 시간이 오후 한 시쯤 된다. 그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해 다섯 시쯤 되면 더 이상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너는 밥을 먹고 수영장엘 가거나 아파트 뒤에 있는 산엘 올라간다. 

  집에 돌아오면 여섯 시나 일곱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들렀다면 요리를 하거나 빨래 혹은 집안청소를 한다. 그 때부터 간단한 저녁을 먹거나 책을 보며 뒹굴다가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좋은 영화를 하면 영화를 보든지 아니면 보던 책을  마저 보다, 자정쯤이 되야 다시 컴퓨터를 키곤 일을 시작한다. 그리곤 새벽 서너 시쯤 잠자리에 든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시계추의 슬픈 범주처럼 정확한 네 일상을 훤히 알고 있는 k는 전화를 했을 때 네가 받지 않으면 불안 해 했다. k는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너와 통화를 하지 못하면 불안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넌 k를 위해 휴대폰을 장만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k와 연락이 닿아야 했다. k는 널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 안달했다.   

  모든 소유는 불안의 근원이다.  

  아무튼 네가 k에게 길들여졌듯, k 또한 네게 길들여졌었다. 그런 k가 어느 순간부턴가 네 궤도를 일탈하기 시작했다. 네가 너무 방심한 탓일까? k를 철저히 분석하지 못한 것일까? 너는 k에게 머리카락 하나만큼의 무게라도 얹게 될까 전전긍긍했다. 

  16

  언젠가 k가 한 말이 생각난다. 

  - 달려오는 여자 싫어. 도도하지 않는 여자 재미없어. 날 사랑한다고 징징거리는 여잔 정말 지겨워. 우리 병원에 찾아오는 여자들 대부분이 내게 추파를 던지지. 모두 정신병원부터 가야 할 여자들이야. 그런 여자들을 보면 질려 페니스도 안 서. 

  넌 k에게 달려가는 여자였을까. 도도하지 않고 너무 헌신적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처음에 k는 네가 무척 도도한 여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네 몸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굳어 있었고, 마음은 누구도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꽁꽁 얼어  붙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수단은 언어다. 넌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오랜 시간 ‘혼자’와 ‘글씨’들과만 뒹굴던 너는, 누군가를 만나자 네 속의 느낌이나 감정 혹은 생각을 표현하는 말조차 매끄럽게 나오지 않았다. 

  k의 병원 회복실에서 처음 k를 받아들이고도, 너의 서툰 인간관계로 인해 k는 네가 경계심과 긴장을 놓지 않거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랬을까? 그래서 k는 뻐꾸기시계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네게 전화를 해 달콤한 목소리로 너를 길들이려 노력했을까? 그렇다면 k는 성공한 셈이다. 

  네가 k에 대한 낯가림이 완전히 없어지는 그 시점을 정점으로 서서히 k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어느 영화를 볼 것인가를 늘 k가 선택했고 너는 순순히 k의 의견을 따랐다. 냉면이 먹고 싶다가도 k가 순두부를 먹고 싶다고 하면, 너도 순두부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금세 마음이 바뀌는 네 자신이 신통할 정도였다. 너는 순대 알레르기가 있어  먹지 않았지만 k는 순대는 물론 순대 국까지 좋아했다. 너는 냄새도 맡기 싫었지만 k가 좋아하는 음식이므로, 결국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려고 노력은 해보았다. 그 노력의 결과 매번 너는 온 몸에 발진이 돋아 한 이틀 약을 먹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k에게 ‘노’라고 할 수 없었다. k가 너를 행여나 피곤해하거나 싫어하게 될까, 네 의견이나 주장을 할 수 없었다. 네가 k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보로 k는 너를 배려하지 않았다. 서서히 너를 기다리게 하기 시작했고, 인색하게 굴기 시작했다. 마음자리를 내어주는데 인색한 것은 물론이고, 금전적인 것에서도 그랬다. 지금 그런걸 따진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지만, k는 네게 구리반지 하나 해준 게 없다. 반면 너는 설, 추석, 생일, 크리스마스 그리고 k의 아내와 딸 생일 선물까지 챙겨주었고, 땀이 많아 피곤해하는 k를 위해 황기(黃芪)를 고아다 날랐다. 물론 그건 네 행복이었을 것이다. k에게 줄 선물을 사러 백화점을 돌아다닐 때와 중닭과 대추, 마늘을 듬뿍 넣고 종일 새카맣게 황기를 고을 때의 그 기분은 행복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너는 k의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을 받고 싶지만, 결국 받지 못하고 말 것이다. 

  17

  심지어는 너를 따돌리기까지 했다.

  어느 가을비 오는 날, 너는 그 동안 k와 연애하느라 출판사에 넘겨야할 번역원고가 밀려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다른 경쟁출판사에서도 새로운 번역 책이 출간된다는 소문 때문에 너와 계약을 한 출판사에선 네 원고만 넘어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k는 오전에 예약된 수술을 한 차례하고는 종일 빈둥거리며 네게 전화를 했다. 지금 바쁘다고 하는데도, k는 세 번이나 네게 전화를 해 저녁에 만나자고 아이처럼 졸라댔다. 너는 그럼 저녁만 먹고 들어오겠다고 하곤 여섯시에 병원 앞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k는 여섯 시 반이 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급한 환자가 왔을 수도 있겠지, 혹은 누군가 찾아와 상담이 길어지겠지, 하고 기다리다 약속시간 보다 한시간 십 분이나 흘러갔다. 너는 k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병원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너는 k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연결이 안 된다는 전자음성의 여자 목소리를 서너 번이나 들은 후에야 간신히 연결이 되었다. k는 양수리에 있었다. 

  - 다섯 시 반에 누가 병원 앞에 외제차를 대고 기다려서 타고 왔어!

  k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병원 앞에 외제차를 대고 기다려서’ 라고. 그냥 차라고 해도 될 것을. 옆에 누군가 있어 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고, 너의 초라함을 강조하고 싶은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을 수도 있었다. k와 시외로 여행을 할 때면 k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늘 오 년 된 네 차로 가기를 원했다. 물론 운전도 네가 하고 기름도 네 돈으로 넣어야만 했다. 한번은 시동이 걸리지 않아 얘를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k는 좀 좋은 차 가져 다닐 수 없느냐고 짜증을 냈다.  

  누구냐고 묻자, k는 술 취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미모의 탤런트들이라고 대꾸했다. k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너는 k를 만나기 위해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다 상기되어 나와선, 한시간 이상 기다리다 다시 집까지 교통체증을 견디며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여덟시 반이 넘어 있었다. 너는 그 날 한 문장도 번역하지 못했다.  

  

  18

  그 때부터 k와 어긋나기 시작했나 보다.

  며칠 후 만난 k에게 그 날 미리 전화를 해줬으면 좋지 않았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k는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벌써 나가고 없었고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너는 그 날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다 거의 다섯시 사십오분이 되어서 급히 차를 몰고 압구정동으로 향했고 휴대폰은 항상 켜져 있다. 또한 네 휴대폰은 발신자 번호가 뜬다. 그러나 그 날 네 휴대폰에는 아무런 번호도 찍히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얘기하자, k는 왜 이렇게 시시콜콜 따지느냐, 설령 내가 거짓말을 했다 치더라도 네가 그만한 희생을 감수하면 안되냐고 되려 화를 냈다. 

  - 넌 날 사랑하잖아, 사랑이란 희생이 뒤따르는 것도 몰라? 난 좋아서 그런 여자들 만나는 줄 알아? 그냥 비즈니스로 만나는 거야, 비즈니스로!

  k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며 너를 코너에 몰았다. 그 순간 k는 자본주의의 들판에서 섞은 고기를 먹고사는, 눈빛이 비굴한, 앞발이 긴 짐승 같았다. 너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앉아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만 바라보았다. 순간 k가 네게서 떠나갈까 두려웠다. 너는 그 때 이미 이별의 냄새를 맡았는지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 때라도 k의 성품을 눈치채고 이별의 냄새를 인정했더라면, 넌 지금과 같은 끔찍한 연옥의 아침에서 눈뜨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넌 그 때 k에게 자신의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다고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 넌 참 순수하다. 어떻게 아직까지 그런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니?

  k는 가끔 너를 빤히 쳐다보며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전혀 계산하지 않고, 목적 없이, 무조건적으로 k를 향해 있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  

  맹목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사랑은 신성하다. 

  몰입이란 아무나와 되는 게 아니다. 

  어디선가 읽은 문장이 생각난다. 너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어쩌면 아무나와 맹목적으로 몰입이 되지 않는 것에 사랑의 함정이 있을 것이다.

  - 사랑이 게임이라는 거 몰라? 

  후배가 말했다. 사랑이 게임이라면 넌 졌다. 그 게임은 언제나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지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넌 사랑을 게임처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탁구공으로 격하시킬 수는 없다는 게 네 생각이었다. 그게 너의 실책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간데 없이 어머니를 빼 닮았단 말인가? 사랑에 있어 어머니는 한번도 교만하거나 도도하지 않았다. 게임이라니, 어머니가 들었다면 눈을 하얗게 흘길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늘 그토록 사랑에 만신창이가 돼야만 했을까?   

  19

  너는 캔맥주를 마저 다 마시고 용기를 내어 k의 휴대폰 번호를 누른다. 여섯 번의 신호음이 간 후에 k가 전화를 받는다. 주위가 소란스러운 걸로 보아 식당인 모양이다.

  “전데요......”   

  “아, 네. 지금 손님과 점심 먹고 있어요.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k는 네 목소리를 금세 알아듣고, 네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도 전에 태연하고 나직하게 경어로 말을 하곤 전화를 끊어버린다. k가 사무적으로 깍듯이 경어를 쓰는 것이 몹시 낯설고 멀게 느껴진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너는 자신이 너무 누추해 벌레처럼 소파 밑으로 기어들고 싶다. 너는 창 밖에서 난무하는 눈발을 힐끗 쳐다본다. 왠지 눈발은 너의 모든 걸 지켜본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했다. 너는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 하나를 집어낸다. 빈속에 캔맥주 두개는 너를 취하게 만든다. 너는 비로소 술 힘을 빌려 눈발을 똑바로 바라본다.       

  20

  k가 아내에게 돌아갔다면 너는 훨씬 견디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k는 분명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에게 돌아가다니, 언제 k가 아내를 떠나기나 했단 말인가. k의 아내는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마취과전문의였다. k는 아내가 요즘 애인하고 잘 안 되는지 집에 와서 짜증을 부린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에 너는 k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 아내에게 애인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 아내가 말하니까.

  - 화나지 않아요?

  - 아니. 나도 가끔 애인 얘길 해. 언제나 아내보단 못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지. 그게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 아니겠어?

  너는 k 부부의 의식수준에까지 미치려면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해야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k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고 했다.

  - 원래 아내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어. 어느 날 내게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 거야. 아내는 의과대학 이년 선배야. 그래서 내 선배고 동기고 뻔히 다 아는 거지. 근데 내가 용의주도하지 못하게 한 선배의 이름을 팔고 외박을 했는데, 들통이 나버린 거야. 그 때 아내는 한 달간 출산휴가를 받아, 딸 누리를 출산하고 퉁퉁 부은 몸으로 집에서 매일 미역국을 끼니때마다 한 대접 식 비울 때였어. 난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스터디 그룹에서 아파트를 빌려 밤샘 공부를 할 때였고. 밤에 집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스터디 그룹에서 빠져나와 ‘슬픈 열대’라는 카페엘 갔지. 물론 아내에게는 선배 집에 가서 잔다고 말했지. 방배동에 있는 카펜데 처음엔 제목이 멋있어 들린 카페였어. 근데 그곳에는 까무스름하고 눈이 약간 찢어진, 그러니까 소피아 로렌처럼 광대뼈가 나온 여자애가 있었어. 초미니스커트에 롱부츠를 신고, 긴 퍼머머리는 사자 갈기처럼 붉게 탈색한 채 서빙을 했어. 딱 한번 본 그 애 생각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 애는 야생마 같은 이미지가 있었어. 그 날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재능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 애와 같이 자는데 성공했어. 그때 그 애는 겨우 스물 한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섹스선수’처럼 잘하더군. 그렇게 딱 한번 그 애와 잤으면 됐는데, 유치하게도 난 좀 길게 갔어. 온갖 거짓말을 다 동원하다 결국 들키고 말았지. 아마 그때 아내는 심한 상처를 받았을 거야. 아내는 화내지 않는 대신 삼 년 간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리고 어느 날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았지. 아내의 첫 애인은 테니스 선수였어. 아내는 테니스를 아주 잘 쳐. 테니스 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반해 쫓아 다녔으니까. 지금은 골프를 치니까 애인이 프로골프인지 모르지. 보통 종족보존의 본능은 삼 년이면 끝나. 그 기간 동안은 암컷이든 수컷이든 제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날을 세우고 경계하고 질투를 하지. 

  질투란 짐승의 본능이야. 

  그러나 삼 년이 지나면 그 종족보존의 본능이 사라짐과 동시에 질투의 감정도 포물선처럼 아래로 떨어지지. 또한 리비도(성욕)점도 제로가 되지. 결혼한 지 사 년째 때, 가장 이혼율이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 아내는 삼 년을 버티더군. 날 할퀴지 않으면서 삼 년을 견디기란 여간 독한 자존심이 아니면 힘든 기간이야. 나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제로가 될 때까지 참았겠지. 질투의 감정이 제로가 되는 순간, 아내는 나를 놓아주는 것과 동시에 자신도 자유로와 지더군. 요즘은 아내하고 사이가 나쁘지 않아. 가끔 서로 안부를 묻듯, 애인 잘 있어?, 하고 묻지. 그러면 아내는 응. 당신 애인은?, 하고 물어. 그렇다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야. 아내와 가끔 러브호텔에 갈 때면 내가 농담처럼 질문하지. 나와 애인 중 누가 더 좋으냐고. 그러면 아내는 천연덕스럽게 페니스는 내 애인이 좀 더 큰데, 테크니션은 당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그래서 당신하고 하는 게 더 좋다고, 역시 농담처럼 말하지. 서로의 연인을 인정하면서 잘 지내. 가족이니까. 가족이란 종이나 물건처럼 찢거나 쪼개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아내가 있고,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남편이 있는 거지. 내가 누구의 손자이면서 아들이고, 아들이면서 아버지고, 아버지이면서 누구의 남편도 되고, 누구의 애인도 되지만, 나는 나일 뿐이야. 그저 나라는 한 개체는 이 세상에 와서 여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 떠나는 거지. 그러나 애인은 바꿀 수 있지만 가족의 범주인 아내는 바꾸지 않아. 이 세상의 제도에 순응하는 나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일거야. 가족이야말로 거대한 인류를 형성하는 세포인 셈이지. 세포가 핵분열을 하면 인류는 병들어 공룡처럼 멸종될지도 몰라.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지만, 내 삶의 형식을 알고도 상처를 받는다면, 그건 상처받는 쪽의 몫일 뿐이야...... 죽을 때까지 한 여자와 혹은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라는 건 사실 형벌이야.   

  21

  너는 한 동안 ‘문화충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최소한 k의 아내에 대한 죄책감은 들 수 있어 좋았다. 사랑의 속성인 소유욕과 집착을 뛰어 넘은 k 부부야말로 어쩌면 정말 사랑이 뭔지 혹은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가정을 지킬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아무리 괜찮고 멋진 애인이 나타나도 감히 k 부부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넌 더욱 그에게 잘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애인은 바꿀 수 있어도 아내는 절대 바꾸지 않는 남자. 애인인 너는 언제고 싫증나면 버려질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너의 존재가 k의 아내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므로, 네 입지는 사실 k의 사랑이 아니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k의 사랑의 강도에 따라 네 존재가 풍전등화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할 뿐이다.          

  말하자면 k는 철저한 가족이기주의자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다. 너는 k 가족의 안녕을 위해 선택된 혹은 스스로 바쳐진 제물인 셈이다. k의 말을 들으며 너는 등이 시렸다. 시간이 흐르면, 열정이 식으면, 너는 어김없이 문 밖에 버려질, k의 생에서 축출될 운명임을 그 순간 알아 차렸던 것이다.

  k의 아내에 비한다면 너는 얼마나 유치한 수준인가. 사랑이 결국은 소유욕 때문에 괴롭다는 사실을 k의 아내는 일찌감치 터득해버린 것이다. 사랑하지만 소유하려고만 들지 않으면 고통도 번뇌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 아내에게 애인이 생긴 걸 알고 처음엔 몹시 괴롭더군. 내가 괴로워 하니까 아내가 그러더군. 자기처럼 생각을 바꾸라고. ‘동반자’라는 의미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게 아니다. 서로 각자의 배를 타고 다만 벗하면서 갈 뿐인 게 동반자다, 라고. ‘부부일심동체’라는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그 말 때문에 결국 이혼하는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완벽하게 분리된 개체라는 거지. 나 때문에 고통 받는 동안 깨달은 것이라고. 자기도 자칫 그 말의 함정 때문에 날 놓칠 뻔했다더군. 그 깨달음이 오자 스스로 자유로워지면서 내게도 자유를 줄 수 있었다고. 결혼서약이 노비문서를 주고받는 건 아니잖아?, 하더군. 서로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거지.   

  k의 아내도 어쩌면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지옥을 에누리 없이 겪었을 것이다. 후배도 그대로 겪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k의 아내도 그렇고 후배도 그렇고. 어쩌면 그들은 각자 한 단계씩 성숙한 것처럼 혹은 허무주의자들처럼 사랑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 소유욕 등에서 벗어난 초월자처럼 굴지만, 실은 그들은 모두 마음의 처녀막을, 정신의 순결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k는 두말 할 것도 없고.    

  22

  너는 비틀거리며 다시 냉장고문을 열고 캔 맥주를 끄집어낸다. 네 행동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 너는 자신의 행동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냉장고 문을 닫고 거실로 향하던 너는 흠칫 놀란다. 벽 속에서 어머니가 성큼 걸어나왔던 것이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모골이 송연해진 너는 캔 맥주를 꼭 쥐고 어머니를 노려본다. 

  늘 거울 앞에서 서성이며 연극배우처럼 자신의 표정은 물론 제스처까지 연출하던 어머니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벽 전체에 거울을 부착했다. 벽 거울 속에서 성큼 걸어나오는 여인은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너였다. 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아니라, 너 자신임을 확인하곤 거실 쪽으로 간다. 네 모습은 간데 없이 실연 당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너는 눈물이 조금 났다. 

  어머니가 낮에도 커튼을 치고 유령처럼 하얀 잠옷을 입고 집안을 서성이며, 낮술을 먹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실연 당한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너는 몇날 며칠이고 어머니와 말을 하지 않았다. 넌 어머니의 고통을 헤아리기는커녕, 유치하고, 하찮고, 혐오스러워, 어머니를 똑바로 쳐다보기도 싫었다. 사랑 따윈 절대하지 않으리라 맹세하며, 넌 네 방에 틀어 박혀 밤낮을 뒤바꿔가며 번역 일만 했다.     너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전화기 옆에 버림받은 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맥주를 마신다. k가 전화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너는 전화를 기다린다. k에게 왜 전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너는 겁이 난다. k가, 이젠 널 사랑하지 않아, 우리 그만 만나자, 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그냥 이런 상태로 불확실하게나마, 희미한 희망을 간직하고, 좀 더 시간을 끌고 싶은지 모른다.     

  눈발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너는 끝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설원에 내동댕이쳐진 애벌레처럼 검은머리를 쳐들고, 추위에 떨며 어느 쪽으로 기어가야 할 지 몰라 두리번거린다. k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k의 다정한 눈빛도 떠오르지 않는다. k는 너를 떠올릴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저리를 칠 것 같다. 징그러운 벌레를 대하듯. 그 정도로 냉랭하게 대했으면 알아먹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아, 차라리 벌레라면 k에게 온 몸으로 기어나 갈텐데.

  욕망이란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다. 

  k를 처음 만난 날 너는 그걸 눈치 챘어야 했다. 순진무구한 너는 사랑과 욕망도 구별하지 못했으며, 행복의 얼굴 뒤에 불행의 얼굴이, 축복 뒤에 재앙이 숨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도 죄라면 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형벌은 받아 마땅하다.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 존재해, 네 명치끝을 쿡쿡 찔러대는 이 강한 에너지. 이 에너지는 식인상어처럼 유혈이 낭자하게 너를 씹어 삼키려한다. 너는 더욱 몸을 똘똘 만다.

  23

  몇 시나 되었을까. 

  눈발이 잦아들긴 했어도 여전히 밖은 새벽인지 저녁인지 얼른 구분이 서지 않는다. 너는 전화기를 껴안은 채 깜박 잠이 들었었나 보다. 전화벨 소리에 너는 수화기를 들고 다급하게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다. 이윽고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초인종 소리임을 알고 현관으로 나가 어안렌즈로 밖을 본 후 문을 열어준다. 

  키가 큰 후배는 머리에 눈을 이고 서 있다. 

  “이렇게 유령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어.”

  후배의 말에 넌 자신을 훑어본다. 너는 흰 잠옷 차림에 머리는 산발이다. 

  후배는 손에 커다란 비닐 봉투 두개를 들고 들어선다. 시장을 봐 온 모양이다. 비닐 봉투에선 사과와 오렌지와 캔 맥주와 소주가 나왔고, 다른 봉투에선 일회용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우럭 회와 깻잎과 상추, 초고추장에다 횟감을 뜨고 남은 뼈까지 매운탕거리로 들고 왔다.   

  “혼자 술독에 빠져 있을 것 같아, 벗하러 왔어. 사실 나도 술이 먹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첫눈이 오는데 아무 놈도 전화 없는 거 있지. 나도 이제 한물 갔나봐. 내가 상 차리고 매운탕 끓이고 할 테니까, 언니는 가만히 앉아 있어. 알았지? 언니는 지금 환자잖아. 가슴에 엄청나게 큰 멍이 든 환자. 그래도 안 죽고 있으니 다행이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기척이 없어,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 짧은 순간 삶과 죽음의 회랑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자살하는 것도 어쩜 유전인자가 있을지 모르잖아. 어머니의 유전인자가 언니에게도 박혀 있을지 알아? 한순간 얼마나 현기증 났겠어? 연애 잘하는 건 유전 안되나?”

  후배는 시장 봐온 물건들을 싱크대 위에 늘어놓으며 너를 웃기려고 노력한다. 아마 후배는 서너 명의 남자들 전화를 다 따돌리고 이 눈길을 헤치고 네게 왔을 것이다. 너는 가끔 이럴 때마다 후배와의 인연을 생각하곤 한다. 저 애와는 전생에 필경 자매였을 것 같다.

  “그 동안 난 좀 씻을게.”

  “그래. 날 위해서 그렇게 해준다면, 고마워. 난 여자든 남자든 섹시한 게 좋거든. 방금 샤워하고 나온 여자가 얼마나 섹시한지 알아? 언니 샤워하고 나오면, 나 언니 덮치고 싶으면 어떡하지? 싱싱한 오이는 있겠지?”

  “나, 웃을 기분 아니니까 그만 노력해.”  

  너는 후배를 한번 노려보고 욕실로 들어간다. 

  거울에 비친 너는 정말 유령 같다. 피부는 거칠하고 눈 밑은 거뭇하게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고 입술은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다. 오디처럼 검은 눈빛은 깊었으나 겁에 잔뜩 질려 있어 생기가 없다. 마치 삽화 속의 눈처럼 영원히 정지되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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