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무무당

그녀는 무무당에서 죽었다.

  봄 태풍이 지나가나? 오월 초, 일요일. 봄바람치곤 꽤 사납게 부는 날 3명의 삼십대 초반 아가씨들이 상담을 왔다. 나이가 한두 살씩 차이가 나면, 나는 꼭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 사주팔자를 같이 보러 오는 사이는 대부분 절친들이거나 자매들이다. 직장 동료들은 같이 오지 않는다. 그들은 직장 동료였지만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다른 직장을 다닌다고 했다. 그래도 여전히 친하다고 했다.


  - 그럼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서로 등에 칼 안 꽂는 결의를 하세요. 선생님 옥호가 무무당이니, 오늘 결의는 ‘무무당 결의’입니다.


  아가씨들은 서로 손은 잡고,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로 의형제를 맺듯 무무당에서 의자매의 결의를 맺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아가씨들에게 ‘무무당 결의’를 맺게 했다. 아무리 험한 팔자가 나와도 함구(緘口)하는 조건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남의 사주팔자는 나쁜 것만 기억하고 자신의 팔자는 좋은 것만 기억했다.


  무무당(無無堂). 이 옥호는 원래 화가 최욱경(1940~1985)이 사용했다. 그녀에게 허락받진 않았지만 아마 흔쾌히 ‘오케이, 괜찮아.’라고 할 것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아주 짧게 스쳐지나갔다. 대학 4학년 봄날. 얼핏 초등학교 소녀 같은 작고 마른 체형의 여인이 청바지와 청재킷과 청베레모와 군인들이 신는 워커를 신고 담배를 피우며 미술대학 건물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인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그 독특한 모습은 생경했지만, 대학 캠퍼스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캠퍼스가 아니면 어디서 저렇게 자유분방한 모습을 본단 말인가. 


  그녀는 서울에서 내려온 회화과 부교수였다. 서울대학교를 나왔으며 미국 크랜브룩 미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초기에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대담한 선과 색채가 주는 강한 리듬감을 통해 자신의 열정과 사유, 철학 등을 표현했다. 이 정보도 인터넷 서핑으로 알게 된 것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을 직

접 본 적도 없고, 수업을 들은 적도 없다. 그녀의 추모회고전도 교묘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스쳐지나가고 5년이 흐른 어느 가을. 친구라곤 한 명도 없는 서울에서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 안의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갔다. 앞 손님이 있어 기다려야 했다. 테이블에 여성잡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무거나 집어 펼쳐 읽다가 이런 시를 발견했다.        

  여의도 시범 아파트에 살면서

  그는 자기 화실을 

  무무당이라 했다

  그림 마른 꽃 담배 냄새 테레핀유

  마흔 다섯 살 처녀 냄새

  쑥을 뜬 진한 독약 같은

  정신이 벽지에 밴 방이었다

  그는 양파를 대충대충 썰어

  어설픈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3백호 그림 마사 그래함은

  춤추는 흑백 열병 같았다

  푸른 꽃이 분홍 회색으로

  분열 쪼개지는 혹은 겹치는

  농담(濃淡)의 사나운 뒤척임도

  강렬한 그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의

  외침을...... 나는 들었다

  무더위에 까망 의상을 입고

  며칠 전 저녁 초대에 푸성귀만 한 접시

  먹던 그를 보았다.

  우린 피차 가깝게 살았다

  정신의 통로 발화 지점의 거리

  제헌절 날 조간에 그가 

  유명을 달리한 얼굴로 웃고 있다

  그는 무무당에서 죽었다

  무채색 거품처럼 이렇게 급히 뛰어가다니!

  - 김영태의 ‘무무당의 새’ 전문


  부제는 ‘최욱경의 죽음’이었다. 최욱경은 그 포스만으로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준 화가였다. 그녀가 죽었구나. 나는 미용실주인 몰래 그 시가 실린 잡지의 페이지를 찢어서 가져왔다.


  무무당이란 단어에 꽂혀 그 날부터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소설이 나의 등단 작품이 되었다. 무무당의 새(1986, 중편소설, 동서문학 신인상). 무무당, 아무것도 없는 곳,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이곳을 탈출하려던 남동생은 자진하고, 남친은 민주화 운동으로 쫒기는 운동권대학생 후일담 이야기다. 


  그 시절, 내 또래 청년들은 민주화를 위해 릴레이로 꽃잎이 떨어지듯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아들을 업고 그런 TV뉴스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불꽃같은 젊은 목숨의 피를 먹고 이룩한 거다.  

  역사는 반복되는 여정인가. 잠시 멈춰 서서 찬찬히 생각해야 할 때다. 나라의 형성 과정이란 건국을 하고, 산업화를 이루고, 피로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선지자가 나타나 우리를 선진국으로 인도하길 빌어본다. 선진국이란 집단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가 존중받는 사회다. 우리는 어떠한가. 언제나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하길 강요한다. 


  시인이며, 화가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1936~2007) 선생은 생전에 딱 한번 뵌 적이 있다. 무용을 좋아하는 나는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하는, 어느 아는 교수의 무용을 보러 갔다. 그 리셉션 장에서 마주쳤다. 나는 지면으로 봐서 선생의 얼굴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선생님의 시, ‘무무당의 새’를 제가 소설 제목으로 차용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선생은 흔쾌히 웃으며 괜찮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도 떠났다. 


  세월이 또 흘렀다. 어느 날 문득, 무무당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졌다. 스님들이 교학을 공부한 강당을 무무당이라고 했다. 모든 절의 강당을 무무당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봉정사는 ‘화엄강당’이라고 했다. 그러나 화엄강당도 무무당인 것이다. 그럼 ‘무무(無無)’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없고, 없다’인가, ‘없는 게 없다’인가. 물론 나는 ‘없고, 없다’,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썼다. 단순하게 공(空)을 떠올렸던 것이다.


  ‘없고, 없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없는 게 없다’는 모두 다 있다는 말이다. 완전히 다르지만 같은 말이라는 걸 아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모든 유형의 사물은 공한 것이며, 공한 것은 유형의 사물과 다르지 않다. 반야심경 첫 구절에 나온다. ‘세상은 다 있다. 없는 것이 없다. 없다는 건 머릿속에 만 있다.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철학자의 강의를 듣다, 무무당을 생각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형상이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 공하고, 공한 것은 어느 조건들의 인연에 따라 모이면 형상을 가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물질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산화하여 없어졌다 해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우주 공간에 에너지로 변화되어 진 것뿐’이라고 했다. 즉, 에너지와 물질은 서로 전환되며, 빛은 파동이면서 물질이라는 말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불교의 반여심경에 나오는 말과 같다. 부처의 지혜를 서양물리학이 증명한 것이다. 무무당의 정확한 뜻을 알아 기뻤다. 없고 없는 게, 없는 게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물질들은 인연(조건)이 닿아 모이면 보이고, 인연이 다해 흩어지면 안 보인다. 그러니 세상은 무상하다. 영원한 게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상하니 애틋하고, 무상하니 사랑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꽃보다 벚꽃을 좋아하고, 늙으니 지금을 사랑하고, 죽으니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무상한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  


  졸지에 ‘무무당 결의’를 한 3명의 아가씨들은 내년과 후 내년에 모두 결혼운이 들어왔다고 하자, 환한 얼굴로 돌아갔다. 사납던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다. 무무당이란 말을 알게 해준 김영태 선생과 화가 최욱경 선생에게 삼가 감사의 절을 올린다. 비범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해, 고단했을, 예술가의 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 두 영혼, 이젠 평안하시길 늦게나마 명복을 빕니다.    

작가의 이전글 [정영희의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