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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의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1-1

너는 도덕주의자들의 땅에서 영원히 추방 당했다


  [1] 11월의  눈

  1

  전화를 아무리해도 받지 않는 꿈을 꾸다 깨어났다. 가슴이 안타까워 빠르게 뛴다. 춥다. 이불을 목까지 꼭꼭 여며도 춥다. 몸 속에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대나무 숲을 휘돌아 나가는 날선 바람 같고, 온 몸의 신경이 칼날 같다. 또한 세포의 구멍구멍마다 진흙으로 막아놓은 듯 답답하다.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힘겹다. 너는 숨을 천천히 들이키며 시계를 본다. 오전 열한 시 십 분. 오늘도 전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서늘한 예감이 네 가슴을 쓰윽, 핥고 지나간다. 

  벌써 열 하루째다. 그 동안 너는 불면에 시달리느라 볼은 수척하고 눈은 핏발이 서 있다. 너는 문득 네가 춘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네가 보살피는 다섯 개의 춘란은 열흘에 한번씩 물을 주는데, 아주 싱싱하여 꽃까지 세 송이나 피워 올렸다. 열 하루째 날이면 공기의 틈새에 슬쩍 묻어 있던 향내가 시들해지는 춘란처럼 k와 통화를 못한 지 열 하루째가 되자, 너는 목이 말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k의 목소리라도 듣고 목을 축인다면 또 다시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k는 너의 뻐꾸기 시계였다. 새벽 네시쯤 잠자리에 드는 너는 오전 열한시가 넘어야 눈이 떠졌다. 오전 열한 시 십 분에서 삼십분 사이, k는 모닝콜을 하는 호텔 직원처럼 어김없이 전화를 했다.

  - 일어났니?

  비음이 섞인 k의 목소리는 거품처럼 부드럽고 식빵처럼 말랑하다. k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은, 제 몸에서 피어나 서서히 제 몸을 삭게 만드는 푸른 녹(綠)처럼 어느 새 네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k의 전화를 받지 않고는 불안해 하루를 시작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다가와 네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k가 언제부턴가 전화하는 시간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했고, 하루를 건너뛰는가 싶더니 이틀, 사흘...... 이젠 네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k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2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키고 k에게 메일을 보낸다.

  - 전화를 아무리해도 받지 않는 꿈을 꾸다 깨어났습니다.

  그 다음 뭐라고 써야할지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만에 그냥 그 한 문장만 보내고 만다. 너는 방안을 오래도록 서성이다 화장대에 놓여 있는 수화기를 집어든다.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은 오지 않는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네가 경멸해 마지않던 어머니 모습 같아 가슴에 천천히 비애가 고인다. 

  그러나 이대로 슬그머니 끝낼 수는 없다. 슬그머니 끝나는 관계야말로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 끝내는 가장 바람직한 이별방식이리라. k는 이런 식으로 슬그머니 끝나기를 원하는 걸까. 그런가? 그러나 너는 아직 아니다. 

  공기 속에 드러난 혹은 시간 속에 내 던져진, 그 무엇도 변질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랑이라는 것도, 특히 부도덕한 사랑일 경우(무엇이 부도덕한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하는 부부야말로 부도덕한 사랑의 전형이 아닐까?), 어차피 시간차를 두고 변질되어 끝나지게 마련이겠지만, 적어도 공기 속에서 먼저 화학반응을 일으켜 변질된 사람이 상대의 마음이 변질되어 끝나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한 때 연인이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너는 독하게 마음을 다잡아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시작하다가도, 어느새 멍히 손을 놓고 k의 무게와 k의 완강한 어깨와 골반 뼈의 감촉이 머리 속에 가득 들어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k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네 어깨의 솜털을 건드릴 때면 너는 몹시 흥분했다. 너는 비로소 ‘사랑을 나눈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으며, 사랑과 섹스는 너무나 가까워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섹스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도 두려워한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이제 너는 섹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다니, 오히려 섹스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k가 네 가슴을 애무하고 널 통째 집어삼킬 듯 온 몸 구석구석을 핥아주던 기억으로 네 몸 깊숙한 곳에 따뜻한 물이 고이고, k가 네 몸 속을 드나들며 널 꽃잎처럼 활짝 열리게 만들어 전율시키고, 이윽고 네 몸이 우주 공간에서 낱낱이 분해되었다 다시 조립되는 듯 하던 기억 때문에,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래, 결국 너를 고통의 도가니에 떨어뜨리는 건 ‘기억’이었다. 네 온 몸에 찍힌, 네가 기억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무수한 k의 지문처럼, 네 마음에 새겨진 문신 같은 기억들. k를 그리워하며 혹은 온종일 전화를 기다리며 행복했던 시간의 기억. 그 시간 동안은 무엇을 해도 즐거웠다. 파를 다듬거나, 국수를 끓이거나, 멸치를 볶고 있거나, 계란 두루마리를 하고 있거나, 마늘을 까거나, 콩나물을 다듬거나, 발톱을 자르고 있을 때나...... 특히 목욕을 하고 있을 때면 몸 안에 등불을 밝힌 듯 네 몸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k를 위해 씻고 닦고 향유를 바르는 너의 표정은 제의를 지내기 전, 목욕재계를 하는 제사장처럼 엄숙하고도 경건하기까지 했다. k가 네 말랑한 세포 하나하나를 어루만질 때의 기억. 머리를 빗겨주고 어린아이를 씻기듯 씻겨주던 기억. 슬프고 연약한 짐승들처럼 만지고 쓰다듬고 핥아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 더욱 가까이 치대던 기억. 이윽고 다다른 오르가즘에 대한 기억, 기억들. 

  그리움이란 좋았던 시간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 때문에 너는 하루 하루가 좁고 깊은 틈새에 끼인 듯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러니 k가 이런 식으로 슬그머니 관계를 끝내는 건 비열하다.

  3

  간호사가 전화를 받는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원장을 바꿔달라고 말한다. 간호사는 네 목소리를 금세 알아듣고 알은 체를 한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수술 중이세요.”

  변하긴 변했다. 수술장갑을 끼기 직전에도 전화를 해, 네 목소리를 듣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마음이 편안하다던 k가, 이젠 열 하루씩이나 네 목소릴 듣지 않고도 잘도 수술실로 들어간다. 어쩌면 넌 이제 약효가 끝나 더 이상 약발이 받지 않는 혹은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처분 해야하는 진통제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k는 더 강도 높은 진통제를 찾듯, ‘첸징 파트너’를 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간호사와 통화를 하는 중에도 그런 생각들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는 k의 전화번호를 누른 너의 손가락을 당장 식칼로 내리쳐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와 굴욕감으로 몸을 떤다. 너는 예의 바르게 통화를 끝내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수술이 언제 끝나느냐고 묻는다. 간호사는 삼사십 분쯤 걸릴 거라고 말한다. 너는 전화가 왔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고 통화를 끝낸다.

  상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몸이 먼저 느낀다. 

  k를 마지막으로 만난 한 달 전,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이상하게 할 말이 없어지면서 k와 네 몸 사이에 알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인간의 육감이란 참으로 레이더망만큼이나 예민하다.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에만 들어서면 뜨거운 입맞춤과 함께 옷 벗기 대회라도 나온 듯, 급하게 옷부터 벗어 던지곤 했다. 옷을 벗으면서도 물고기처럼 입은 붙어 있었다. k는 네 윗입술을 물고 너는 k의 아랫입술을 물고. k와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입맞춤이란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를 너는 깨달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k와 너는 입맞춤을 하지 않았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인간은 입맞춤을 한다. 창녀가 키스를 하지 않는 연유도 이러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 창녀는 애인에게 따뜻한 입맞춤을 할 것이다.   

  k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그처럼 감미롭고 온 몸의 솜털이 올올이 물구나무서는 짜릿한 입맞춤을 한 기억도 없거니와, 입맞춤을 하고 싶은 남자도 없었다. 마치 곤충이 교미를 하듯 타성에 젖어 행위만 말없이 했을 뿐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러브호텔에 들어가면 들어서자마자 껴안고 우선 입맞춤부터 한다. 그러나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나면 각자 겉옷을 벗고 욕실에서 차례로 씻고 나온다. 그러므로, 

  입맞춤이란 성욕(육체)의 수단이 아니라, 사랑(영혼)의 수단이다.

  그 날도 k와 사랑을 나눈 게 아니라, 교미를 한 기분이었다. ‘그 날도’ 라고 하는 이유는 이미 한참 전부터 k는 너와의 섹스에 몰입하지 않았다. k가 몰입하지 않는 만큼 k의 뿌리 또한 시들했다. 그 때 너는 이 사람과의 인연이 소멸되고 있구나, 하고 희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인연의 소멸이 이처럼 네 생(生)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줄, 그 때는 미처 깨닫지도 못했었다.

  

  4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그 고통이 또한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어쩌면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그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별리의 고통인데, 그 별리의 고통까지도 사랑의 연장선상이다. 그 고통까지 끝나야지만 비로소 한 사랑이 매듭 지워진다. 그리하여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은 과거형이고, 고통은 그 고통을 잊게 해 줄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빨리 끝나지지만, 우리가 믿을 거라곤 ‘시간’밖에 없다고, 후배는 ‘사랑학 개론’을 강의하듯 말했다.

  - 사랑이 게임이라는 거 몰라? 언니, 전화하지마! 언니가 그럴수록 그 사람 더 멀리 달아날 거야. 핑퐁 볼처럼 한번 전화를 했으면, 그쪽에서 받아칠 때까지 악착같이 기다려야해.

  - 전화가 안 오면 어떡하니?

  넌 이미 날개가 꺾인 작은 새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 언니가 상처주지 않은 이상 분명 오게 돼 있어. 바람둥이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건 못 견뎌하지. 자신은 별 짓을 다하면서도 말야...... 그 동안 독한 연애도 한번 안 겪고 뭐 했수? 언니처럼 ‘그대 이름은 순정’ 스타일은 백전백패 하게 돼 있어. 왠지 알아? 바람둥이들은 프로를 좋아하지. 특히 먹물 꽤나 먹은 치들은 더해. 자기가 가진 기득권에 티라도 묻을까봐 더 겁을 내지. 그러니 순정, 그거 골치 아파하지. 순정(純情)이란 침대시트를 피바다로 만드는 처녀막처럼, 혹은 수습딱지 달고 있는 애숭이 기자들의 어설픈 질문처럼 성가셔 하지...... 언닌 이제 다음에 오는 사랑은 잘 할거야.

  다음에 오는 사랑이라니. 누군가를 또 다시 만날 것 같지도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고, 사랑할 것 같지도 않다. 네가 누군가에게 가슴을 여는데 삼 년이나 걸렸는데, 또 다시 몇 년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후배 말대로 사랑이 게임이라면 너는 다시는 k에게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머리로는, 이성으로는 안 되는 게 어디 있으랴. 그러나 가슴이 말을 안 듣는 데야, 너도 별 수 없이 감정에 휘둘리고 만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알겠지만 감정을 통제하기란 마음같이 쉽지가 않다. 상대가 전화 할 때까지의 기다림이란 피를 말리는 전기고문 같고, 공기라곤 한 점도 없는 진공상태 같고, 깊은 물 속 같은 법이다. 

  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폐가 파열되어, 아니 네 몸이 파열되어 우주 속으로 산산이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전화선은 진공상태에 갇힌 너의 산소튜브였고, k는 산소 통이었다. 산소 통에는 더 이상 네게 공급할 산소가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 너를 공포에 떨게 했다. 

  5

  너는 싸늘해진 양손을 겨드랑이에 찔러 넣고 주방으로 나온다. 무심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창문 가득 눈이 내리고 있다. 첫눈이다. 11월의 눈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법이다. 모두 전화를 하느라 공중전화기 앞에 줄을 서거나, 어느 건물 현관에서 휴대폰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애인들에게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이년 전, k를 만나는 날도 이렇게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 날 너는 창 밖을 바라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에 대해 생각했다. 목젖이 거세당한 사람처럼 도시의 한복판에서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아무와도 교접하지 않고, 침묵의 성에 기거하는 수도승처럼 자신에게 엄격하게 굴며, 고요히 네 질서 속에서, 넌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았다. 

  네 스스로 외로움을 견디기만 하면, 그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라는 단어는 네게 익숙하다. 누구는 결혼을 선택하듯, 너는‘혼자’를 선택해서 ‘혼자’와 머리를 맞대고, 몸을 비비며 잘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가끔 자신을 성찰할 시간과 조우하게 될 때면, 너는 약간 깊이 네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장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 내려 수영장엘 갈까하는데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파리에서 오 년 동안 공부하다 돌아와 세 번째 개인전을 하는 중이었다. 너는 오픈 때 가지 않았다. 아마 다른 긴한 약속이 있다고 핑계를 댔을 것이다. 너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 다행이 네가 하는 일이 혼자서 하는 일이라 더욱 사람들과의 접촉은 없었다. 

  부역(賦役)하는 노동자처럼 스스로 정한, 하루 오십 매 정도의 번역원고를 채우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혼자’와 살다보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겁이 나기도 했던 것이다. 네가 만나는 사람은 주로 일 때문에 잠깐씩 만나는 몇 명의 출판사 직원이 다였고, 그나마 이메일로 일을 주고  받기 때문에 얼굴을 맞댈 일조차 별반 없었다. 

  - 언니,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앞으로 나 안보고 살려면 알아서 해!

  전화를 받자 대뜸 후배는 협박부터 했다. 

  첫눈 오는 날, 외출할 건수를 제공한 후배가 고맙기까지 했다. 

  후배를 만날 때는 좀 멋있게 하고 나가야 한다. 두 살 아래 인 후배는 워낙 모델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데다 찰랑한 생 머리를 허리까지 하고 있어 무척 섹시하다. 지독하게 사랑한 남자와 캠퍼스가 떠들썩하도록 유별난 열애 끝에 결혼했지만 석 달만에 이혼하고 파리로 날아가 버린 후, 여태 너처럼 독신이다. 늘 바지 차림으로 대충하고 나가는 네게, 후배는 잔소리를 하곤 했다.

  - 그렇게 안티섹시하게 하고 다니는데, 누가 데이트를 신청하겠어? 언니는 왜 그렇게 섹시하게 보이는 걸 죄악시 해? 수컷이고 암컷이고 상대의 시선을 끌고 싶은 건 자연의 섭리 아니야?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유별나게 몸치장을 많이 하고 화장을 짙게 하고 다니던 어머니로 인해, 너는 거의 맨 얼굴로 다녔다. 뿐만 아니라 너는 향수를 끔찍이 싫어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건 모두 싫어했다. 어머니는 향수를 집에서도 심심하거나 불안하면 뿌려댔다.

  너는 무릎까지 오는 까만 세무치마와 검정 폴라 티셔츠를 입고, 체인으로 된 벨트를 하고, 롱부츠를 신고, 알카파 은회색 코트를 입고 눈오는 거리로 나섰다. 네 외출복 중에서 가장 여성적인 옷이다.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은 얼핏 어머니 같았고, 왠지 네 몸에서 암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너는 바지로 갈아입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파리지앵’같은 후배를 만나려면 그래도 이 정도는 공을 들여야 잔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았다. 

  6

  그 날, 너는 자동차 모양의 백설기처럼 변한 네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했다. 이미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너는 택시를 기다리며, 밤무대 가수였던 어머니를 잠깐 떠올렸다. 

  어느 겨울, 어머니도 이처럼 첫눈이 쏟아지는 날,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부츠를 신고 무엇에 홀린 듯 거리로 뛰쳐나가던 일이 생각났다. 스무 살에 널 낳은 어머니는 네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너무나 젊었다. 쇼핑을 같이 할 때면 늘 언니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말을 듣기를 좋아했다.

  압구정동까지 이십 분이면 갈 거리를 너는 거의 사십분만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완전히 저물어 도시의 네온이 어둔 하늘을 분할하며 점점이 반짝였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체인을 감지 않은 차들이 거북이 운행인데다 중간에 사고가 두 군데나 나 있어, 교통체증이 극심했다. 그러나 너는 짜증나지 않았다. 첫눈 오는 날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붉은 미등의 깜박임과 여기저기서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경적 소리가 마치 축제 분위기처럼 느껴졌다. 늘 갈 데라곤 아무데도 없는 너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아파트 창을 통해 휘몰아치며 내리는 눈을 망연히 바라보곤 했다. 택시 기사도 느긋해 보였다.   

  첫눈은 사람들의 마음을 동심으로 되돌려 놓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후배가 일러준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과 조금 떨어진 오층 건물을 찾는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일층은 고급 여성의류점이었고, 이층은 성형외과였고, 삼층은 치과였고 사층 오층은 사무실이 임대하고 있었다. 화랑은 지하 일층에 있었다. 그 건물을 보는 순간 후배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눈을 털며 바삐 어둑한 지하계단으로 내려서다, 층계참에서 문득 너는 걸음을 멈추었다. 네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너무 고요해 귀가 먹먹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아수라장으로 변한 지상과는 달리 지하는 적요했다.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지하는 딴 세상 같았다. 한순간 너는 동화 속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잘못 찾아 온 건가? 아니면 후배가 기다리다 화랑 문을 닫고 가버렸나?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지하 계단을 다 내려서자, 저 만큼 조용한 빛이 새어 나오는 화랑 입구가 보였다. 너는 침을 삼키고 호흡을 조절하며 급한 마음과 대인 기피증으로 인한 불안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환하게 조명을 밝힌 화랑에는 라벨의 볼레로가 들릴 듯 말듯 흐르고 있었다. 화랑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중앙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던 후배는 네가 들어서자 그 큰 키로 성큼성큼 다가와 두 팔을 벌려 반갑게 포옹을 했다.

  - 우리의 성녀께서 드디어 출타하셨군.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모습으로.

  후배는 네 모습을 쓰윽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는 너를 무척 좋아했다. 아마 너보다 열 배쯤은 더 좋아할 것이다. 파리에서 날아드는 편지 횟수를 비교하면 그렇다. 후배가 한 열통쯤 보내면 너는 겨우 카드 한 장을 채워 보내곤 했다. 

  -......언니, 난 이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어. 그러나 아무나와 섹스는 할 수 있어......

  언젠가 이런 말을 적어 보낸 이후, 후배는 별별 얘기를 다 적어 보냈다. 스위스 남자와 동거하면서도 그 남자가 잠시 귀국한 사이, 자신과 섹스를 나누는 세 명의 남자에 대한 용모나 성격은 물론, 그들의 페니스 크기와 모양, 테크니션까지 비교 분석해서 적어 보내곤 했다. 

  페니스가 큰 쟝은 테크니션이 떨어져 자신을 짜증나게 하고, 테크니션이 뛰어난 폴은 아주 예민한 반면 페니스의 크기가 작아 한 번도 자신을 오르가즘에 도달하게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둘은 늘 그녀를 원해 화가 날 때가 있다고 적었다. 테크니션의 가장 중요한 건 달콤한 말을 하든 야한 말을 하든 전희단계에서 상대를 흥분시키는 것인데, 쟝은 아둔해 그녀를 흥분시킬 줄 모르고 황소처럼 씩씩하게만 하면 되는 줄 아는 바보라고 했다. 영민한 폴은 온갖 칭찬과 야한 말의 성찬과 애무로 그녀를 흥분시키지만, 정작 자신만 끝내고 그녀에겐 마무리를 안 해줘 신경질 난다고 했다. 

  음악가인 토마스야말로 정말 예술적이라고 했다. 페니스가 바나나처럼 휘어져 있어 그것만으로도 그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는 그녀를 친숙한 악기처럼 잘 다룬다고 했다. 그와의 섹스는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킨다고도 적었다. 피아니시모로 시작해, 피아노, 안단테, 안단티노, 포르테, 포르테 피아노, 오래도록 반복되는 포르테, 포르테 피아노...... 그러다 이윽고 서로의 가슴이  땀으로 젖는 클라이맥스가 지나면 다시 피아노, 피아니시모, 피아니시시모로 끝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너무 바쁘기도 하고 그녀가 아니라도 아내와 또 다른 애인이 둘이나 더 있어, 그와 만나려면 기다림의 미학과 소유욕을 버리는 걸 먼저 배워야한다고 했다. 예술적인 섹스를 할 줄 아는 남자를 기다리는 건 흥분을 동반한 기다림이라 오히려 생활이 즐겁다고 했다. 잊을만하면 그는 꼭 연락을 한다고 했다. 일 년에 한 두 번을 만나더라도 토마스야말로 평생 옆에 두고 싶은 애인이라고 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도 상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연기를 할 때도 있지만, 섹스를 잘 못하는 남자(대부분 성에 무지하거나, 아주 이기적이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후배는 적었다.)는 아무리 돈이 많고 지적이고 직업이 좋고 용모가 수려해도 애인으로서는 피곤해서 만나기 싫다고 했다. 매번 오르가즘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물을 때마다 늘 오르가즘에 도달했다고 거짓말을 한다고도 적었다. 그래도 역시 자신과 동거하는 스위스 남자가 제일 좋다고 했다. 그는 페니스가 크지도 않고 테크니션이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성실하다고 했다. 쟝처럼 무식하게 굴지 않고, 폴처럼 자기만 끝내고 돌아눕지 않고, 그녀가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까지, 절대 귀찮은 내색 없이, 자신은 이미 끝났다하더라도,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손으로 부드럽게 애무해 끝까지 마무리를 해 준다고 했다. 그는 섹스의 예의를 알고 상대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신사라고 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은 그와 섹스를 한 후, 껴안고 잠드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더 이상 성(性)에 대해 솔직할 수 없는 후배의 편지를 읽는 건, 네게 하나의 즐거움인 동시에 그녀의 극심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너는 저릿한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한 참씩 집안을 서성이곤 했다. 한편 성에 그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그녀가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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