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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석복수행 중입니다

석복은 복을 아끼고, 복을 소중히 여겨 저금하는 태도

“나는 그대에게 출가해서 불법을 배우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단지 복을 아끼는 수행을 하라고 권하겠다.” 송나라 여혜경이 항주절도사로 있을 때 대통선사의 선본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선사가 한 말이다. (한양대 정민교수의 세설신어 중에서)


석복(惜福), 복을 아낀다는 말이다. 석복수행은 복을 아끼는 수행(修行), 즉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을 소중히 여겨 더욱 검소하게 생활하는 태도를 말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저녁에 집에 와서 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언제나 ‘하고(ing)' 있는 중에 집중을 하는 게 수행이며 기도며 참선이라는 걸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젊은 날 수행이나 기도나 참선은 저 높은 곳의 차원이나, 어딘가 신성한 장소에 가야지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기도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신(神)에게 내가 원하는 걸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 게 기도인 줄 알았다. 막연히 아들을 위한 기도를 일 년 전부터 시작했다. 참 염치도 없이 제발 저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라고 빌었다. 첫 마음은 그랬다.


그러나 기도를 할수록 점점 내 마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며 잘못한 일들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얼마나 교만하게 살았는지, 몸이 오그라들도록 부끄러웠다. 먼지보다 더 작은 나를 발견하는 순간 사라지고 싶었다. 그 동안 인간이란 존재가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건 그저 관념에 불과했다. 내게 주어진 복을 아낄 줄 모르고 함부로 쓴 죄가 이렇게 힘든 시간으로 돌아오는구나 싶었다. 석 달 열흘 쯤 울고 나니 눈이 파랗게 변해 있었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이 고요한 마음이 참 좋다.


팔순이 넘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묵주기도를 한다. 부활절이 다가와 ‘고백성사’를 할 때 신부님께 아침저녁으로 묵주기도를 하는데 부족하지요, 하고 고백을 했단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성사를 본 보석으로 묵주기도를 한단 더 하라고 했단다.


어머니의 기도는 뻔하다. 자식과 손자와 증손자가 오늘하루 무사히 잘 지나가기를 비는 것이다. 언제부턴가는 자는 잠결에 당신을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도 빈다고 했다.


- 인간은 얼마나 아파야 죽을까?

무릎 관절염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어느 날 전화로 한 말이다. 나는 잠시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인간이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신은 그때에야 비로소 ‘구원’해 준단 말인가. 그 구원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의 이동일거라 생각한다. 태아가 더 이상 양수에서 견디지 못하고 바깥세상으로 이동하듯 말이다. 어머니는 평생 석복을 하느라 힘드셨는데, 이제 그 복을 좀 누릴만해지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인간은 한 삶을 온전히 걱정근심 없이 살다가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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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른다섯 살 과년한 딸의 사주를 보러 온, 육십 대 여인의 얼굴이 어찌나 평온하고 고요하던지, 이 여인은 복을 많이 저금해 두었구나 싶었다.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 해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옮기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하물며 복을 저금하는데 힘들지 않겠는가.


복을 ‘저금’한다는 건 결국 힘들고 고통스런 일인 것이다. 그 여인은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살았지만, 저렇게 평온한 얼굴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느 시간 동안, 복을 저금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기억할 수 없는 전생이든, 전 전생이든 말이다. 아니면 덕을 많이 베풀며 살아, 복이 마르지 않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십년간 간암을 앓던 남편의 병수발을 하던 친구는 그 십년간 복을 엄청 저금해 두었는지, 남편이 떠나고 얼굴이 평온해졌다. 뭐든 나누고 베풀려고 애썼다. 이거 예쁘네, 하고 말하면, 너 해, 라고 말하며 선뜻 준다.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는 모습이 한 ‘도(道)’ 닦은 것 같다. 난 아직도 내가 아끼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남들에겐 하찮은 물건이지만 내겐 그 물건과의 소중한 추억이 있는 것이다. 추억을 공유한 물건을 잃어버리면 며칠이고 별리의 아픔을 견딘다. 이래가지고 득도는 무슨, 요원한 꿈으로 남을게 분명하다.


불행하고 힘든 사람은 말이 없다. 또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남 몰래 눈물을 흘린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낮출 줄 아는, 영혼이 깨끗한 사람이다.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머지않아 ‘추운 겨울이 다 지나가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김종해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의 사주팔자가 궁금해 찾아오는 상담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 생년월일시, 네 기둥의 여덟 글자는 하느님의 프로그램이자, 바코드다. 그럼 왜 자신은 이 바코드로 태어났을까 질문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쉽다. 종교란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우리 정서와 맞아 떨어진다. 지금의 힘든 삶은 전생의 업(業)이자 성적표다. 가톨릭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십자가며, 하느님의 디자인이다.


그럼 왜 자신은 이렇게 힘든 생으로 디자인 됐을까. 그건 신의 뜻이다. 신의 뜻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다. 힘들고 고통스런 삶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높은 단계의 영혼으로 성숙시키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부자가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는지.


인간적으로 해석하면 고통스런 삶은 복을 저금하는 시기이며, ‘석복수행’의 시기라 생각한다.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듯, 복이 가득 찰 것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아들에게 차를 타고 가며 이 얘기를 해 줬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차창 밖으로 눈길은 보내며, 제 항아리는 엄청 큰가 보네요, 했다.


복을 아끼기만 하면 안 된다. 복을 아껴서 덕을 베풀어야 석복수행의 완성이다. 또한 복을 저금하지 않고 쓰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저금한 복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 복을 다시 채우려면 천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 수많은 생을 ‘고달픈 삶’으로 거듭 살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을 채워가면서 살면 복이 쉽사리 바닥나지 않을 것이다. 복을 저금하는 일은 덕을 베푸는 것이다.


덕을 베푼다는 것은 꼭 물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이유는 사덕(四德)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덕이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한다. 즉 인은 측은지심(惻隱之心 :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며, 예는 사양지심(辭讓之心 : 겸손한 마음)이며, 지는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라 했다.


사덕을 잘 행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덕을 베푸는 것이고, 복을 저금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덕을 쌓는 일은 멀고도 험하다.


아무튼, 저는 지금 석복수행 중입니다. 세상의 모든 석복수행 중인 이들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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