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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나는윤회를믿는 가톨릭신자다

술 먹고 놀기를 좋아하니 기생이었던 생도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윤회(輪廻)를 믿는 가톨릭 신자다, 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쓸 거라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 친구는 밤길 조심해야 할지 모르니까 걱정된다고 했다. 칼럼이란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글의 형태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글이면 더욱 좋겠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친구는 가톨릭 신자지만 나랑 말이 통한다. 말하자면 가톨릭 근본주의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종교든 근본주의자들은 위험하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 이외는 모두 이단으로 치부하고 악령으로 본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변신한 친구를 나는 영영 잃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입만 열면 모든 종교를 비난했다. 나는 어떤 종교든 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다. 심지어 농담으로 종교는 가톨릭인데 신앙을 붓다이즘 플러스 샤머니즘이라고 말할 때도 있다.


  오래전에 본 다큐멘터리 방송이 생각난다. 독일여자가 우리나라의 무속인 ‘김금화’씨를 찾아와 신내림을 받고 ‘김금화’씨의 신딸이 되었다. 그녀는 어떤 령의 힘에 의해 방언을 마구했는데 그게 한국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도 있고 딸도 있는 가톨릭 신자였다. 독일로 돌아가 신부님을 만나 자신이 무당이 되었다고 고백을 한다. 그러자 그 독일 신부님의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 당신을 우리 교회가 돌보지 않아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을 섬기세요. 누구나 자신의 신을 섬기며 사는 겁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30프로 가량이 윤회를 믿는다고 한다. 그 30프로 안에는 불교 신자는 물론이고 가톨릭 신자와 기독교 신자도 포함되어 있다. 윤회을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해석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불교 교리를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건 그저 내가 생각하는 ‘상식적이고 단순한 의미의 윤회’를 말하는 것이다.  


  철이 들면서부터 든 오랜 궁금함은 ‘천재’들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무지의 상태로 태어난다. 그런데 왜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나 첼리스트 ‘장한나’ 같은 음악가들은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연주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랜 생각 끝에 얻은 단순한 답은 모든 사람들이 지금하고 있는 자신의 직업(職業)을 죽을 때까지 갈고 닦으면 다음 생에 태어날 때는 지금 보다는 조금 더 ‘진화된 영혼’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생을 그치다 보면 어느 생에선가 인간이 신(神)의 경지에 이르는 때가 있으리라. 여기서 신의 경지라는 것은 카르마가 완전히 깨끗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가톨릭 적으로 해석하면 천국에 갈 것이고,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극락으로 갈 것이다. 말하자면 윤회의 고리에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직업의 업(業)이 불교에서의 카르마라고하는 업(業)과 한자가 똑같다. 불교의 윤회론은  전생의 업에 따라 다음 생의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고 한다. 이승에서 만나는 인연 또한 업연(業緣)에 의한 것이라 하니, 착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유혹에 약하다. 그래서 착하게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조물주인 하느님은 그런 인간에게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은 선지자를 보내 선함의 가드레일을 정해준 게 아닐까.(생각이 같지 않다고 돌을 던지지는 마시라.)     


  수많은 생을 살며 더럽혀진 영혼을 정화시키고, 더욱 진화시켜 완전한 영혼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런 삶일수록 영혼은 더욱 깨끗해지겠지만, 그 과정 동안 또 다시 부정적인 삶을 살면 말짱 도로묵인 것이다.  


  그 지난한 삶의 과정을 글로 묘사해서 ‘이것이 인생의 맛’이다, 라고 보여주는 게 소설가의 업인 것 같다. 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 반대이면 난 새로운 업을 쌓게 되는 걸까.


  전생에서 남을 아프게 하면 이승에서도 그만큼 자신도 아픔을 당해서 전생 채무를 청산해야 우리의 영혼이 조금씩 진화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가족과 주위 친구들과 내게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수많은 전생 중 어느 생에선가 나와 서로 인연을 주고받은 사이인 것이다.   


  나름대로 삶의 기준을 세웠다. 나를 몹시 힘들게 하는 사람은 내가 그 사람에게 전생의 채무가 있는 것이고, 그 힘든 고통을 겪으면 내 영혼은 조금 더 성숙해질 것이다. 그러나 혹여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할 때는 새로운 업을 짓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로.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업연이 끝나지면 안 봐도 되는 걸까.   

  성당에 앉아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저 신부님은 전생에 어떤 업을 지어 저렇게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봉사하며 살아야할까 생각할 때가 있다. (분심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힌다.) 아마 다음 생에서는 더 높은 지위의 수도자로 태어나거나, 좋은 가정을 이루고 살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천국으로 가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 마음을 다치게 하며 도움을 줄 때가 있다. 옛날 같으면 원망을 했을 텐데, 지금은 전생에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며 못됐게 했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다. 콤플렉스가 많아 늘 상처받던 마음은 윤회를 믿음으로서 상당한 위무가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들에게만은 끔찍하게 잘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전생에 연인이었나 싶을 때도 있다. 연인이었다면 내가 아주 고약하게 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생에서 그 빚을 갚느라 이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의 무의식에는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한다. 눈만 뜨면 신문이든 책이든 활자를 봐야하는 나는 어느 생에선가 가난한 선비였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림과 글짓기를 잘했으니 예술가였던 생도 있었을 것 같고, 몇날 며칠이고 혼자 면벽하고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어느 생에선가는 스님이었던 적도 있었을 것 같다.


  또한 대나무 숲과 호수를 날아다니는 중국의 무협영화를 보면 속에서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어나니 ‘고독한 검객’이었던 생도 있었을 것 같고,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를 보며 엽문(양조위 분)의 무공에 넋을 놓고 빠져드니 무술인 이었던 생도 있었을 것 같고, 영화 ‘적벽대전’의 제갈량(금무성 분)이 미치게 좋으니 하늘의 기운을 읽을 줄 아는 책사였던 생도 있었을 것 같다. 무당들 굿판을 보면 신이 나니 무당이었던 생도 있었을 것 같고, 술 한 잔 먹고 유쾌하게 떠들고 놀기를 좋아하니 기생이었던 생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번 생에서 좋은 습관을 몸에 익혀 다음 생에서도 좋은 습(習)을 가진 훌륭한 인간으로 태어나길 소원한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생을 거듭 ‘착하게’ 살아야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게 될까.


  아, 카르마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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