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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장편소설]아프로디테의 숲2-1

사랑은 미친 짓인 동시에 올가미다

  [2] 첫눈

  광대뼈를 깎는 힘든 수술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네 방으로 와 창 밖을 보니 유리창 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다. 11월의 눈이다. 너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숨을 멈춘다. 힘든 수술을 한 날은 독주를 마시고 H를 안고 싶다. 그러나 이제 H와는 정말 끝내야 한다. 이럴 때마다 넌 표류 당한 사람처럼 가슴이 막막해진다. 이미 네 마음에 일어났던 화학작용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H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시계를 본다. 열한 시 사십 분. 책상 위에 메모가 붙어 있다.

  H 씨 전화 : 11시 20분.

  신윤희 씨 전화 : 11시 30분.

  심한 치통을 느끼는 사람처럼 너는 어금니를 깨물며 양미간을 좁힌다. 너는 오른 손으로 천천히 메모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왼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고 오른손 검자로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길게 네 번 울린다.

  “여보세요?”

  아내의 잠긴 목소리다.

  “나야......”

  “왠 일이야?“

  “첫눈 오잖아.”

  “전화 잘못 건거 아니야?”

  “첫눈 올 때 아내에게 전화하면 안 돼나? 오늘 나랑 술 한잔하자......“

  순간 전화기 저쪽은 떵 빈 공간처럼 적연해진다.

  “여보세요?”

  “난 당신 아내야. 애인이 아니고.”

  아내의 목소리는 축구심판처럼 준엄하다. 집에서 만나는 여자는 아내고, 밖에서 만나는 여자는 애인이다. 네 부부생활은 게임처럼 룰이 있다. 그 룰을 어기면 진다. 지는 사람은 상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아내의 요구는 당연히 이혼이다.

  “옛날 애인이기도 하잖아......”

  네 부부는 서로의 애인을 인정하는 대신 절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외박도 금물이다. 사랑에 빠지거나 이유 없는 외박을 하게 되면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너는 지금 몹시 불안하다. 이미 게임에 졌지만 아내는 아직 모른다. 아내가 눈치채기 전에 넌 H를 정리해야 한다. 네 자신도 이렇게 깊이 H에게 빠져들지 몰랐다. 너는 어린 아이처럼 아내를 졸라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아내와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하던 너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신윤희에게 전화를 한다. H를 건너뛰기 위해선 새로운 여자가 필요하다. H를 만나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었다. 전화통화를 하지 않은 지는 정확하게 열하루째 된다. H를 생각하니 가슴에 미열처럼 통증이 지나간다. 내 속에 아직도 이처럼 순백의 공간이 남아 있었다니. 사랑은 상대적인가 보다. H가 더럽혀지지 않은 첫 마음으로 네게 다가왔으므로 너 또한 그러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넌 지금 거의 그 수위에까지 와 있다.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릴 순 없다. 넌 왕관을 버릴 만큼 용기가 있거나 혹은 어리석지 않다. 네게 있어 왕관이란 반듯한 가정이다. 결정적으로 H의 집착이 느껴지는 순간 넌 정신을 차렸다.

  사랑은 미친 짓인 동시에 올가미다.

  넌 H로부터, 아니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2

  신윤희는 석달 전 어느 가을비 오는 날 네게 환자로 왔던 유명 탤런트를 차에 태우고 병원 앞에 나타난 여자다. 그녀도 한 때는 탤런트였다. 대사 몇 마디하지 않는 사극의 궁녀로 몇 번 나온 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연예활동을 하지 않는다. 서른 여덟 살인 그녀는 평법한 주부인데 회색 벤츠를 몰고 다녔다. 유명 탤런트는 네 고객이었지만 그녀는 그날, 가을비 오는 날 처음 만났다. 여섯 시가 다 되어 전화가 왔다. 유명 탤런트가 병원 앞에 차 세워 뒀으니 빨리 내려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신윤희가 회색 벤처 운전대를 잡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날 여섯 시에 병원 앞 커피숍에서 약속이 있었다. 일이 밀려 바쁘다는 H를 억지로 만나자고 떼를 써서 약속을 한 날이었다. 그러나 너는 신윤희를 보는 순간 H와의 약속 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신윤희는 그날 너를 태우고 양수리로 갔다. 양수리에서 술을 마신 다음 서울로 나온 그녀는 친구인 유명탤런트를 집 앞에 내려주곤 술이 취한 너를 호텔로 데리고 들어갔다.

  얼굴과 몸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깨끗한 피부는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삼십대 초반 같았다. 그녀가 독신이라면 너는 물론 그녀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탤런트 초년 시절 인천에서 백화점을 두 개나 가진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가 따라다녀, 본처와 이혼시키고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본능적이고 단순한 여자다. 차는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하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루이비통 헤어밴드에 오천만 원 정도 하는 다이아몬드 박힌 피아제 시계에 이 캐럿짜리 다이아 반지에 목걸이 귀걸이 세트, 역시 다이아몬드가 박힌 비취 브로치와 페레가모 가방에 발리 구두, 프라다 원피스나 샤넬 투피스에 버버리 트렌치 코트를 입고 다녔다. 마치 명품에 목숨 거는 여자처럼 신상품이 나오면 끝없이 사야 하는 쇼핑중독증 환자이기도 했다. 네가 평범한 ‘조르지오 알마니’ 칠십만 원짜리 가죽 시계를 끼고 다니는 걸 측은하게 여겼다.

  백 퍼센트 보스 캐시미어 진회색 롱코트를 입고, 지방시 감색슈트에 흰색 드레스셔츠, 거기에 에르메스 넥타이와 까르띠에 벨트, 페레가모 구두와 로렉스 금딱지 시계 정도는 차야 ‘압구정동 성형외과 원장님’ 격에 맞지 않느냐고 은근히 야유하곤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격이란 곧바로 환금화 될 수 있는 고가의 물질이다. 이 나라가 공산주의나 식민지가 된다고 해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여인이다.

  취향이 약간 저속하지만 쾌활하다. 무엇보다 감정이 드라이해서 좋다. 다시 말해 네가 그녀에게 감정몰입이 되지 않는 게 좋다. 그녀 또한 그랬다. 너는 그런 지적인 매력이 없는 여자에겐 절대 빠지지 않는다. 넌 가끔 섹스파트너가 필요했고 그녀 역시 그랬다. 설명하지 않아도 진정한 프로처럼 거래가 산뜻했다. 돈 많은 그녀가 언제까지 네 성욕을 자극할 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성욕이 생기기 않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손을 들어 보이곤 웃으며 사라질 것이다.

  잃을 게 많는 영악한 여자는 절대 남자에게 빠지지 않는 법이다.

  “잘 잤어? 이동 중이라고? 오늘은 어디서 점심 먹어?”

  너는 마치 일처럼 그녀를 관리해 둔다. 그녀는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을 내보내고, 파출부가 오기 바쁘게 스포츠센터로 향한다. 그곳 골프연습장에서 두 시간쯤 열심히 골프연습을 한다. 그 사이 휴대폰을 주고받으며 어디서 점심을 먹을 것인가 친구들과 약속한다. 주로 특급 호텔이나 압구정동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나 비싼 점심을 먹는다. 그런 다음 다시 근사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한 두 시간쯤 수다를 떨다 쇼핑을 겸한 시장을 봐서, 여섯 시까지 집에 들어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요리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이 주부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다. 남편과 이이들에게 절대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일류고 키운다. 아들 둘 다 전교 일 이등을 다툰다고 했다. 물론 고액과외의 덕이다. 그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을 서울대학교에 집어넣을 것이고, 그 다음은 유학을 보낼 거라고 했다.

  “너무 일찍 유학을 보내는 사람들은 바보예요. 우리나라에선 학연과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면 학연과 인맥을 잡을 수가 없잖아요.”

  그녀는 나름대로 자식교육에도 열성파였다. 가끔 그녀 친구 애인들이 등장해 밥을 사기도 했다. 그녀 친구들은 대부분 애인이 있었다. 물론 너도 그녀 친구들에게 근사한 점심을 이미 샀다. 그들은 모두 잠재된 네 고객인 셈이다. 성형외과의사라는 직업은 연애하기에는 그만이다. 네게 추파를 던지지 않는 여자가 거의 없다.

  “그래?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눈이 많이 오는데? 알았어. 기다릴게.”

  신윤희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H를 만나고 싶었지. 그러나 H에겐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H를 생각하면 통증과 함께 겁이 난다. 한 번도 이렇게 자신에게 겁이 날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은 없다.

  너는 인터폰으로 간호사에게 자신은 점심약속이 있으니 먼저 점심을 먹으라고 말한다.

  3

  등 높은 회전의자를 돌려 창 밖을 본다. 눈발은 여전하다. 첫눈 치고 허벅지게 내린다. 이 년 전 H를 처음 만나는 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다. 처음 H가 화랑 안으로 걸어 들어올 때 너는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를 보고 그렇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보긴 처음이었다. 단발머리에 은회색 코트를 입은 H는 어느 다른 시간, 다른 공간 속에 존재하다 스크린 밖으로 걸어나온 여자 같았다. 속세에 사는 여자가 어떻게 저런 성직자 같은 분우기를 풍길 수가 있단 말인가. 수도원의 수녀가 사복을 입고 잠깐 외출한 것 같았다.

  이 건물주(엄격히 따지자면 아내의 유산이다)인 너는 임대한 지하 화랑에서 하는 전시회를 빠지지 않고 다 보았다. 가끔 네 취향에 맞는 그림을 사기도 해 병원 벽에는 그림이 꽤 걸려 있다. 처음엔 파리 유학파인 H의 후배와 노닥거리는 재미로 지하 화랑을 들랑거렸다. 그 후배는 한 마디로 아주 매력적인 인디언 여자 같았다. 백 칠십쯤 되는 큰 키에 생머리를 길게 허리까지 길렀고 눈썹 위까지 자른 앞머리에 아이라인으로 눈 화장만 새카맣게 하고 다녔다. 그 후배는 코트 안에 스타킹처럼 붙는 검정 ‘쫄바지’에 엉덩이까지 오는 철쭉색 실크 브라우스에 벨트를 매고, 앵글 부츠를 신고 다녔다. 얼핏 민화 속에서 튀어나온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전사 같기고 했다. 네가 아내에게 상처를 입힌 ‘슬픈열대’의 서빙하던 여자처럼 육감적이고 야성미가 있었다. 성(性)에 대해 거침없는 것까지도 그랬다.

  너는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없으면 불안하다. 마치 저금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처럼 불안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머니처럼 아내가 널 버리고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으로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늘 저금해 둔다. 저금해 둔 여자가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흡사 아편쟁이처럼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연애중독자였다. 외롭고 쓸쓸하고 세상은 온통 비애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 당시 네 옆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 너는 사실 독신이라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H의 후배와 연애를 한번 해볼까 망설이던 중이었다.

  “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선배 언닌데요, 그 언니는 자신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스스로 알지도 못해요.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영문 번역 자격증도 있어요.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애인도 없이 일만 하고 살아요. 연애도 안 하고 무슨 낙으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후배의 말에 묻어 나온 H. 너는 H가 번역한 소설을 두세 권 정도 읽은 기억이 났다. 번역이 제 이의 창작이라는 말에 값할 수 있을 정도로 H의 문장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너는 그 H가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리며 매일 진료시간이 빌 때마다 화랑으로 내려가 후배와 노닥거렸다. 그러나 전시회 마지막 날이 되어도 H는 나타나지 않았다. 너는 급기야 후배에게 H를 좀 불러내 보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 후배는 눈빛을 반짝이며 금세 무슨 말인가를 알아듣고 H를 네 앞에 불러내었다.

  H는 뽀얀 피부에 오디처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작은 여자였다. 겁먹은 듯 경계하는 눈빛으로 너를 바라볼 때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먹빛 눈동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도여인의 슬픈 눈빛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무구한 눈빛 같기도 했다. 너는 태연하게 보이려 애썼다. 되도록 천천히 차를 마셨고, H를 바라볼 때는 사려 깊게 보이려 노력했다.

  H는 너와 같은 판화 작품을 골랐다. 후배의 화려한 판화 작품들 중 붉은 색이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그림이었다. 코발트 블루 바탕에 용트림하듯 피아노의 검은 건반이 솟구쳐 올라가는 듯한 그림이었다. 그 후배의 내면에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폭풍이 몰아치던 날 구상한 작품 같았다. 블루계열을 사용한 건 어쩌면 그녀의 역설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후배가 훨씬 섹시하다. 그러나 넌 H를 보는 순가 첫눈에 반했다. 첫눈에 반하는데 삼초가 걸린다고 하는 ‘카텍시스 현상’이 네게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넌 사실 심리학적 용어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네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4

  너야말로 얼마나 출세지향주의에 이기주의자인가. 이 년 선배였던 아내가 그 당시 스위스대사 무남독녀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너는 그녀를 네 여자로 만드는 데 너의 두뇌를 몽땅 투입했다. 요즘은 골프를 치지만 대학 때 그녀는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를 치는 오만한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넌 그녀가 진심으로 좋았다. 그녀 주위엔 언제나 많은 선후배들이 있었다. 너는 그녀의 배경과 매력을 탐내는 무리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넌 그녀를 네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처음엔 자연스럽게 선후배로 지냈지만 농촌 봉사활동을 가서 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내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마치 심복인양 그녀가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고마워, 하고 네 눈을 보며 말하곤 했다. 그녀도 널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여자들의 내면에 강간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을 아는 너는 저녁을 먹은 후, 그녀와 마을을 산책하며 어느 후미진 골목길에서 약간 거칠게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녀는 몹시 흥분했다. 결국 봉사활동을 끝내고 돌아온 날 서울역에서 모두 해산한 후, 그녀와 넌 다시 역 광장의 시계탑 아래서 만났다.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여관을 찾으러 다니던 때를 가끔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된다. 그 많은 여관이 그날 따라 왜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지.

  섹스에 있어 넌 자신 있다. 시골 촌놈인 네가 가진 거라곤 시쳇말로 불알 두 쪽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두 쪽은 어떤 재력보다 힘이 세다는 걸 너는 안다. 그 다음부턴 그녀가 널 찾아왔고, 그녀가 더 널 원해서 결혼했다.

  넌 전공도 성형외과로 정했다. 자본주의와 가장 잘 결탁할 수 있는 과는 비뇨기과와 성형외과라는 걸 넌 이미 간파했다. 비뇨기과를 선택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넌 역시 여자들을 상대하는 게 적성에 맞았다. 비뇨기과를 택한 네 친구 인규는 압구정 현대 백화점 앞에서 개업을 했다. 네 병원은 그와 좀 떨어진 갤러리아 백화점 쪽에 있다. 그는 요즘 일본에서 단체로 음경확대 수술을 받으러 오는 일본 관광객들로 인해 낮이고 밤이고 정신이 없다. 그 친구는 어쩜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너는 그 돈이 탐이 나 성형외과를 택한 걸 약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도 방학 때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서 봄까지는 정신없이 바쁘다. 은행에 돈 넣을 시간을 놓쳐, 매일 천만 원이 넘는 돈 가방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서로 바빠 약속을 몇 번이나 취소한 끝에 겨우 그 친구를 만나면 미처 이야기도 나눌 새 없이 미친 듯이 폭탄주를 마시곤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도 너처럼 자본주의의 들판에서 썩은 고기를 먹고사는, 앞발이 긴 하이에나 같다고 느끼는지 모른다.

  산다는 건 어차피 굴욕이지 않는가.

  문득문득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상관없다. 넌 돈을 벌고 싶다. 네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건 돈밖에 없다. 더 이상 돈 때문에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고, 새어머니의 등쌀에 밀린 아버지가 남의 집에 가서 구걸의 거짓눈물을 찍어낼 일은 없을 것이다. 돈버는 재미와 돈의 위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널 욕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돈 없어 봐라 문둥이 보다 더 서럽다.”

  새어머니의 십팔번 문자다. 너는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편히 살 수 있도록 얼마 전에 고향 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해 주었다. 물론 두 분이 살기에 충분한 생활비도 보낸다. 그러나 그 생활비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너는 안다. 이탈리아에 성악공부를 하러 간 이복 막내 동생에게로 다 갔다. 그 동생이 한 달 전에 돌아왔다. 그들은 아마 너를 믿고 막내를 유학 보냈을 것이다. 막내와 넌 열 살 차이이다. 그 사이에 시집 간 두 이복여동생이 있다. 여동생들 또한 친정에 와서 무엇이든 훑어 간다. 고향 집으로 보내는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

  새어머니와 아버지는 막내를 끔찍이 생각한다. 맏이인 너는 의무만 있고 막내는 권리만 있는 것 같다. 가끔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넌 새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주었을 뿐이고, 그 다음은 그들의 몫이다. 그들은 네게 아귀처럼 돈만을 요구했다. 돈만 던져주면 널 괴롭히지 않았다. 너는 그들을 되도록 만나지 않고 산다. 그들은 너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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