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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당신의 지음을 위해

피었으니, 피어 있다가 지는 것이 인생이다

  - 까칠할 나이 지난 거 아니니? 난 네가 B친구니까 그냥 만났던 거야.

  한 이틀 불편한 마음을 추스르다, 이건 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전화를 했다. 네가 이러이러한 얘기를 해서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그러면 A는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말한 거니 마음을 다쳤다면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평소에 나를 공격할 일만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벼르고 있었던 사람처럼 화를 내며, ‘안보면 그만이지’ 뭘 그런 걸 가지고 따지냐고 했다. 따지려는 게 아니라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풀려고 전화한 거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제풀에 언성을 높이고는 ‘모임 너네 들 끼리 해’,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고 동창 여섯 명이 모였다. 그 중 A가 내게 한 말이다. 그 날 모임 때 이상하게 나를 쿡쿡 찌르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A와 B는 나의 베스트 친구는 아니지만 여고 때부터 같을 반을 했고 일 년에 서너 번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애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친구들이다. 친구. 그렇지 나는 분명 ‘친구’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B보다 A를 더 자주 봤다.

  A를 와락 좋아하게 된 거는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내게 열어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아픔을 안다는 건 그녀 내면의 향기를 내가 안다는 뜻이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A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녀가 그리운 것이다. 물론 나의 아픔도 그녀는 거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어떤 작은 복병을 만나게 되자, A의 진심을 알게 돼 버렸다. 먼 길을 가 봐야 그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더니. '네가 B 친구니까 그냥 만났던 거야', 라는 말이 손톱 밑의 가시처럼 아팠다. 이틀 밤을 꼬박 잠들지 못했다.  

  물론 A는 다시 전화가 왔고, 마치 자기가 던진 돌에 맞은 내 잘못이고, 그 돌을 맞은 후 아프다고 말한 내 잘못인 것처럼 말했다. 긴 변명을 들어야 했고, 까칠할 나이 지난 거 아니냐고 했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오버했나보다고, 마음 다쳤다면 사과한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풀었다. 

  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피해의식이 많다. 피해의식은 질투로 나타나고, 질투는 콤플렉스의 일종이며,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경우, 자신의 잘못을 지적당하면 공격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 A의 그런 모습도 마음 아프지만, 무엇보다 나 혼자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아픔이 더 컸다.

  사람들은 참 쉽게 누군가를 만나다가, 아니면 말고 식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데 새삼 놀라고 있다. 이럴 때마다 난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된 것처럼 낯설다. 

  - 외로워 인간들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곳에는 더한 외로움이 있었다.

  중학교 때 읽은 헤르만 헷세의 ‘황야의 늑대’에 나오는 말이다.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오십 세가 넘으면서 나는 재경 동창회도 나간다. A와 B는 동창회에는 나오지 않는다.

  - 너 진짜 환골탈태 했네. 동창회도 나오고.

  나를 잘 아는 C가 말했다. 그녀는 여섯 명 중의 한 명이다. 그때 난 와락 C가 좋았다. 무리와 잘 섞이지 못하는 나를 안다는 것이 어찌나 반갑고 고맙든지.

  - 잘난 척 해봐야 고독밖에 안 남아서.

  내가 답했다. C와 나는 눈을 마주보며 깔깔 웃었다. 친구란 상대를 안다는 것이고 상대를 

안다는 것은 깊은 애정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든 한편이 되는 것, 즉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리란 조폭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의리란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과 시간을 내어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다. 

  동창회에서도 여전히 ‘황야의 늑대’처럼 외롭다. 그래도 간혹 C같이 나를 알아주는 벗을 만나기도 한다. ‘황야의 늑대’도 지척인 거리에 종족이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피었으므로, 진다’(이산하의 산사기행 중). 피었으니, 피어 있다가 지는 것이 인생이다. 피어 있는 동안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만난다. 물론 내게도 지음에 갈음할 만한 친구가 다섯 손가락을 꼽을 만큼은 있다. 한명만 있어도 성공인데 난 그만하면 부자인 셈이다. 

  지음(知音),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이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온다. 이 말은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 명수 백아(佰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鐘子期)와의 우정에 관한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백아가 높은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참으로 근사하다. 눈앞에 높은 산이 선하다.’ 하고 말했다. 백아가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기가 막히는구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네.’ 하고 감탄을 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이 고사를 생각할 때면 백아에게는 종자기가 지음이지만, 종자기에게도 백아가 지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그랬을 것이다. 종자기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을 다 알아주는 친구가 백아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관계는 엄청난 상처를 안고 어느 순간 깨져버렸을 터이다.

  집단 혹은 무리 속에서 다른 생각이나 다른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은 곧바로 별난 성격의 소유자로 분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복지우(心腹之友), 마음이 맞는 극진한 벗이 서너 명은 된다. 필시 그 서너 명의 친구들에 자족하지 않고 욕심을 낸 탓일 게다. 그 지우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산다. 가까이 사는 친구를 만들어보려 했던 게 결국 상처로 끝나고 말았다.

  비즈니스 관계는 오히려 쉬울 수 있다. 애정을 주지 않기 때문에 쿨하다. 관계가 틀어졌을 때는 굳이 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오케이,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까지, 라고 생각하며 털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대 여섯 명이 만나는 동창 모임에서는 쉽지 않다. 친구가 아니고 그냥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면 패싱이다. 그러나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단이 난 거다. 한 쪽은 안보면 그만이지, 왜 그깟 말로 따지냐고 하고, 한 쪽에선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된다.

  지란지교(芝蘭之交), 난초와 지초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이르는 말.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나무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문경지교(刎頸之交),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이 잘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라는 뜻으로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친구를 이르는 말.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과 포숙의 사귐이란 뜻으로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관계를 이르는 말. 금란지계(金蘭之契), 쇠와 같이 굳고 난초와 같이 향기로운 사귐이란 뜻으로 견고한 벗 사이의 우정을 이르는 말. 막역지우(莫逆之友), 서로 거스름이 없는 친구라는 뜻으로 허물이 없이 아주 친한 친구를 이르는 말.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를 일컫는 말. 단금지교(檀金之交), 쇠라도 자를 만큼 강한 교분이라는 뜻으로 매우 두터운 우정을 이르는 말. 망형지교(忘形之交), 신분 지위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친하게 사귐을 뜻하는 말. 

  모두 친구 사이의 두텁고 단단한 우정을 일컫는 고사 성어들이다. 하나하나의 고사에 얽힌 이야기는 한결같이 가슴 찡하고 눈앞이 붉어지는 히스토리들이 있다. 그 어느 고사에도 일방적인 짝사랑은 없다. 그러므로 우정이란 서로를 향할 때만이 성립된다. 짝사랑은 있어도 짝우정이란 없다.

  그리고 지음(知音). 난 이 말이 제일 좋다. 당신의 지음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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