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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종일 환자 기다리다 등골이 휘는 거 같다

   책 광고였는지 고전문학 소개 시리즈였는지 기억에 없다. 오래 전 신문에 실린 사무엘 베케트(1906~1989, 1969년 노벨상 수상)의 주름진 노년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도 있구나. 배우의 얼굴도 아닌데 그의 얼굴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난 그 사진을 소중하게 오려 문방구로 가져가 코팅해서 책장에 세워두고 매일매일 본다. 


  특히 오늘처럼 종일 우울한 날은 좁은 오피스텔을 서성이며 베케트의 주름투성이 얼굴을 하염없이 본다. 그도 죽을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의 눈은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허공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흑백사진이었지만 그의 깊은 눈은 분명 청회색일 거라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정말 그의 눈은 청회색이었다. 심연. 그의 깊은 청회색 눈은 심연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했다.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 작)’를 나는 고등학교 때 구입한 기억이 난다. 도덕선생이 일러 주기만하면 마구잡이로 책을 사던 시절이었다. 신구문화사 노벨문학상전집 시리즈에 끼여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에 세로쓰기로 인쇄된 책이었다. 그 책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지금 내 책장에는 민음사(2012년)에서 나온 책이 꽂혀 있다. 처음 그 희곡을 읽었을 때의 충격적인 떨림은 잊을 수가 없다. 아, 이렇게 단순한 말들로 이렇게 절망적인 인간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구나 싶었다.   


  종일 우울했다. 상담으로 바쁜 와중에도 우울하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내 영혼의 한 귀퉁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습관처럼 책장에 세워둔 베케트의 주름진 얼굴을 본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어릴 때는 방학을 기다렸다. 겨울이면 봄을 기다렸고, 여름이면 가을을 기다렸다. 오래 전 아열대 기후인 동남아를 처음 갔을 때 알았다. 사계절이 있다는 게 신의 축복임을. 일 년 열두 달 이렇게 덥기만 하다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일 거 같았다. 그 지루함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기다림이 없는 삶.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는’ 끔찍한 시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삶의 형식이 있을 것이다.)   


  에스트라공 : 나는 이런 짓을 계속할 수 없네.

  블라디미르 : 그것은 자네 생각이지... 우린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없네.

  에스트라공 : 어딜 가도 마찬가지지.

  블라디미르 : 고고, 그런 소리 말게. 내일이면 다 잘 될 거니까.

  에스트라공 : 잘 된다고? 왜?

  블라디미르 : 자네 그 꼬마가 하는 얘기 못 들었나?

  에스트라공 : 못 들었네.

  블라디미르 : 그 놈이 말하길 고도가 내일 온다는군. 그게 무슨 뜻이겠나?

  에스트라공 :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뭐.

  블라디미르 : 내일 같이 목이나 매세. 고도가 안 온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고도가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사는 거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섣불리 토를 달기도 쑥스럽다. 늙고 가난한 두 방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조차 모른 채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는 매일 매일이 지긋지긋하고, 우울하고, 절망스럽고, 번뇌에 휩싸인다. 고도를 기다릴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희망이며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베케트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통해 인간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기다림에서 시작해서 기다림으로 끝이 난다. ‘나는 기다린다, 고로 존재한다.’ ‘기다림’이란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명제(命題)다. 고도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베케트는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거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시 돌아가자.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왜 이렇게 불안하고 우울하단 말인가. 가을이 너무 길어서 그런가. 올해 가을은 수상하게 길다. 11월 중순이면 첫눈이 오기도하고 영하권으로 떨어지기도 할 텐데 올해 가을은 지루하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말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다. 나는 겨울을 기다리는가. 아니다. 나는 ‘생활’이 끝나지기를 기다린다. 생활이란 호구지책으로 하는 일이다. 생활이 끝나지고 내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이란 오롯이 내 영혼만을 위한 시간이다. 침묵서원을 한 수도자처럼 혼자 실컷 책을 본다든가, 실컷 영화를 본다든가, 글을 쓰기 위해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는 짓들 말이다. 아아,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건 신의 은총이다. 나는 ‘밥벌이’를 해결하는 일이 끝나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것은 고도처럼 오지 않을 것이다. 


  - 종일 환자 기다리다 등골이 휘는 거 같다.


  산부인과 개업을 한 친구의 문자를 받고 잠시 멍했다. 이 친구는 환자를 기다리는구나. 의사는 환자를 기다리고, 변호사는 의뢰인을 기다리고, 검사와 형사는 범죄를 기다리고, 약사는 손님을 기다리고, 신부과 목사와 스님은 신도를 기다리고, 기자는 특종을 기다리고, 학원선생은 학생을 기다리고, 콜걸은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시인은 시상(詩想)을 기다리고 소설가는 서사(敍事)를 기다리고, 위정자는 표를 기다리고, 처녀는 총각을 기다리고, 총각은 처녀를 기다리고, 바람난 유부녀는 어린 애인을 기다리고, 불임부부는 아이를 기다리고, 농부는 비를 기다리고, 어부는 고기를 기다리고, 월급쟁이는 월급을 기다리고, 역술가는 사주볼 사람을 기다리고, 무당은 굿할 사람을 기다리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죽음을 기다린다. 하여,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가.


  우리 모두는 거대한 하나의 배를 타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대가 의사를 하든 변호사를 하든 정치를 하든, 혹은 대리운전을 하든 택배기사를 하든 환경미화원을 하든,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말이다. 신의 위대함은 인간에게 공평한 죽음을 선사함에 있다.


  ‘어느 날 태어났고, 어느 날 죽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것들의 비애에 관한 희곡이다. 시간의 검증을 거친 석탑처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불후의 명작이다. 베케트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결국 종일 우울한 이유를 알았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백 매 쯤 쓴 장편소설은 usb에 잠들어 있다. 주인공은 주인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지니’처럼 매일매일 나를 기다릴지 모른다. 자신의 이야기를 빨리 끝내달라고.


  히트작도 없고 명작도 못 쓰면서 왜 난 포기가 되지 않는 걸까. 왜 한 동안 글을 못 쓰면 우울할까. 이렇게 사느니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내 심연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를.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내 속의 외로움에게 느리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블록버스터 영상과 디테일한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문장으로밖에 전달 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묘사가 분명 존재한다. 사랑과 미움과 원한과 분노 같은 거 말이다. 그러므로 시인이나 소설가는 소비되지 않는다고 해서 한물간 예술가가 아니다. 글씨로 혹은 문장으로 영혼의 소중함을 되짚어주고, 또 되짚어주며 지난한 기도를 하는 주술사(呪術師)들이다. 


  찬바람이 분다. 다시, 나만의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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