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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미네르바의 부엉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다 사라지고 없는가

   미네르바(Minerva)의 부엉이는 철학의 추사성(追思性)을 비유한 말이다. 추사성이란 ‘철학이나 진리탐구가 어떤 사건에 선행하기보다는 일이 다 끝날 무렵에 알게 된다‘는 뜻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저서 ‘법철학’의 서문에 있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짙어지자 날기 시작한다’에서 나온 말이다. 오랜 사유와 오랜 시행착오와 오랜 지혜의 연마 끝에야 비로소 현명한 판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사유의 가장 높은 단계가 철학이라 생각한다. 철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과 그 대상에 대한 탐구다. 다시 말해 정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이며,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학문의 원류이기도하다. ‘왜’라고 질문하는 자만이 세계를 이끌어간다. 이미 나와 있는 정답을 잘 맞히기만 하는 자는 창조하는 자는 아니다. 일류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세상은 정답을 잘 맞혀 일생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한다. 신들의 왕 제우스와 첫 번째 아내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하나다. 메티스가 임신했을 때, 땅의 신 가이아가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린다.


  그런데 태어날 시기가 되었을 때 심한 두통을 못 견딘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쪼개달라고 부탁한다. 머리를 쪼개자 그 속에서 아테나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며 태어났다. 남성 전쟁의 신이 아레스라면 여성 전쟁의 신은 아테나, 미네르바다. 미네르바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이다. 미네르바는 항상 부엉이를 데리고 다녔다.   


  부엉이는 야행성이며 서양에서는 지혜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가 해가 져야 활동하듯이 지혜도 모든 일이 끝나는 저녁 무렵에야 피어난다는 뜻이다. 이걸 인간에게 대입하면 황혼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도 지혜로워진다는 말일 것이다.


  한국에서 미네르바는 2009년 ‘표현의 자유’의 상징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2008년 한 인터넷 논객이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정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주목을 받았다. 리먼 브러더스사의 파산을 예견하는 등,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수위가 높아지자, 서울 중앙 지검에서 ‘인터넷상의 허위사실 유포’죄로 긴급 구속했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석  달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이 일로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는 열띤 공론을 불러일으켰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인간의 삶도 아침이 있고, 낮이 있고, 황혼이 있으며, 밤이 있다. 이걸 인도의 인생4주기에 대입하면 아침은 공부하는 학습기(學習期)에 해당할 것이고, 낮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가주기(家住期)일 것이고, 황혼은 숲으로 가 수행을 하는 임서기(臨棲期)일 것이고 밤은 지혜를 전파하는 유행기(遊行期)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 인생의 황혼은 언제부터 황혼일까. 아무리 장수하는 시대라고 해도 육십갑자를 다 산 이후는 인생의 황혼기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여태 정신없이 살아왔다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청춘을 흉내 내려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 천박한 문장은 끝임 없이 욕망을 부채질해서 물건을 팔아먹으려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상술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빈약한 내면을 돌아보고 지성과 지혜를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발악을 하듯이 겉모습만 젊게 보이려고 한다.


  특히 남자들은 그저 젊고 예쁜 여자에 탐닉한다. 성욕이 사라지면 금방 무덤으로 들어가는 줄 착각한다. 감각과 본능을 이겨내는 게 지성이다. 도대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다르지 않다면, 왜 교육이 필요한가. 본능대로 짐승처럼 살 거면 배움이 왜 필요한가 말이다. 어느 날 내게 하소연한 후배의 말이 며칠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예쁘고 글 잘 쓰는 싱글인 후배가 있다. 그 후배에게 어느 봄날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25년 전에 잠시 알았던 분이었다. 그 분은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풍채도 있고, 인물도 좋고, 학벌도 K고와 S대를 나왔으며 아이비리그 출신 유학파이기도 했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나이(82세)였다. 후배는 너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후배는 나이만 빼면 자신이 만난 어떤 사람 보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부자고, 인품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난한 문인단체에 기부도 하는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평소 존경하던 분이라 저녁을 같이 하자는 걸 흔쾌히 응했단다. 모습도 망가지지 않고 여전히 멋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시인 최영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근히 ‘진주’를 기대하며 자꾸 유도하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나이에 그 지성은 어디가고, 그 지혜는 다 어느 시궁창에다 버리고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 언니,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요. 그 나이가 되어서도 아직도 ‘진주’를 꿈꾸고 있다니, 참 슬펐어요.

  후배의 전화를 받고 오래도록 ‘천박함’에 대해 생각했다. 천박함의 반대어는 우아함 혹은 품위 있음일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우아하고 품위 있게 나이 들 수 있을까. 아침 태양도 찬란하지만 황혼녘의 저녁노을도 얼마나 장엄하게 아름다운가. 만물을 먹이고 자라게 한, 뜨거운 한 낮의 시간을 지나 곡식이 열매를 맺게 하는 시간, 가을의 시간, 충만의 시간, 황혼의 시간은 또 얼마나 거룩한가. 그 때를 아는 공부, 자기 자신을 아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 분은 황혼이 되어도 욕망과 집착을 갈무리하는 수행을 하지 않았고, 수행을 하지 않았으니, 밤이 되어도 지혜를 전파할 게 아무것도 없고, 오직 짐승처럼 본능만 남은 가난하고 천박한 노인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 지혜가 당신을 지루한 늙은이로 변모하게 할 것이다.

  어디에 나오는 말인지 모르겠다. 악마적인 문장으로 보아 파우스트(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희곡)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 같기도 하다. 악마는 파우스트가 지혜로워지는 걸 싫어한다. 학문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는 절망하여 자살하려 한다. 이때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신이 유혹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하느님과 내기를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쾌락적인 삶을 선사하는 대신 영혼을 넘겨받기로 계약 한다.

  - 아, 내 가슴속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을 받아 젊어진 파우스트 박사가 ‘두 개의 영혼’과 투쟁하는 이야기다.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하여 파멸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온갖 역사적 과거와 신화적 과거가 뒤섞인 추악한 세계에서도 그는 결국 신의 은총을 받은 그레트헨의 숭고한 사랑에 의해 구원 받는다. 이 결말은 ‘악마조차 선을 창조해내는 힘의 일부분’이라는 괴테의 종교관에서 기인된 것이라 여겨진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추잡한 방탕함을 우리는 도처에서 목도한다. ‘과감히 세속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수행하는 기간이 황혼녘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 이 시대에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다 사라지고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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