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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잉글랜드 수선

그들은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영혼으로 태어날 것이다

20년째 다니는 수선집 이름이 ‘잉글랜드 수선’이다. 실제 평수가 다섯 평이나 될까싶은 작은 공간에서 부부가 일을 한다. 원래는 여자 혼자서 했는데, 남편이 의류회사 미싱공으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합류했다. 둘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을까는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부부는 키가 작다. 아이 셋을 낳고 개미처럼 일하며 산다.

강북 쌍문동에서 강남의 가락동까지 오전 5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7시 반까지 일하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10시 반에 잔다고 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먹고, 도시락을 싸서 5시 반까지 출근해서 수선 일을 한다. 일요일만 쉬고 매일 그렇게 생활했다.

나는 팔다리가 한국의 기본 체형보다 길쭉하게 생겨 새 옷을 사면 무조건 잉글랜드 수선 집을 거쳐야 한다. 헌옷도 늘 수선해서 입기를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어디로 이사를 하든지 수선 집 여자와 잘 사귀어 놔야 한다. 가락동에 터를 잡은 지 20년 째 되니 그녀를 만난 것도 그렇게 되었다. 여자는 솜씨가 좋아, 까다로운 내 취향을 잘 헤아려 늘 나를 감탄케 했다. 어느 날 보니 키 작은 남편은 반백이었다. 이들을 보면 숙연해진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을 닦고 있는 구도자 같기 때문이다.

난 언제부터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을까. 젊은 날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을 변화시켜보려고 감히 펜을 들었었다. 늘 세상과 불화했고, 세상에 적의감을 드러내며 허공에 종주먹을 날리듯 살아왔다. 그러나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돌아보니 세상은 더 타락했고, 더 더럽혀지고 있었다. 물질문명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해보겠다는 꿈은 그저 헛꿈이었다.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삶이 편리해지고 몸은 점점 더 편해지지만, 정신적인 윤리와 도덕은 아사 직전이 되었다. 아마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인간의 정신은 죽고 말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신은 굶어 죽었다’라고. 사람들은 정신에게 밥을 주지 않는다. 정신에게 밥을 주는 방법도 모른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공부만 잘해 돈만 잘 벌면 성공한 자라 가르친다. 행복한 청소년이 없는 나라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나라가 되었다.

정신의 일용한 양식은 독서(Reader)뿐이다. 독서에서 출발해서 모든 문화예술로 나아가게 된다. 심지어 스포츠까지 그렇다. 독서는 사고력을 키우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리더(Reader)를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리더(Leader)가 되기는커녕,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도 쉽지 않다. 독서력이 없이 성공한 연예인이나 스포츠맨들은 매우 위험하다. 자신이 바라보고 가야할 별 혹은 소명(召命)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살게 된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런 막사는 이들을 목도한다.

우리는 왜 전생과 환생과 저승을 만들어냈을까. 저승이 없다면, 전생과 환생이 없다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 죽음이 끝이라면 제 욕망대로, 본능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낸 이유는 뭘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격을 완성’해 가고 ‘영혼을 성숙’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어느 날 내 꿈은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도 불멸의 작품을 남기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한 동안 나는 불멸의 작품을 써서 사람들의 기억에 불멸하는 작가가 되려고 파랗게 나를 불태웠다. 그러나 문학도 인간도 모두 돌부처처럼 돌아앉아 말이 없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작품들은 센세이션한 사건들에 묻혀버리기 일쑤였고, 진심을 담아 마음을 준 인간들은 끊임없이 내게 상처를 주었다. 습자지처럼 얇은 내 영혼은 가랑비에도 구멍이 뚫렸다. 오래도록 아파했고, 오래도록 사색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세상은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한 수행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또한 농부의 쟁기처럼 수행을 위한 나의 쟁기구나 싶었다.

불환(不還). 다시는 욕계(欲界),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돌아오고 싶지 않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용돌이치며 3초마다 번뇌에 사로잡히는 뜨거운 마음을 끄고 영원히 고요한 상태의 열반에 이르러야 불환하리라. 다시 말해 모든 집착을 놓은 적멸의 경지에 들어야 욕계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4아승기(빅뱅) 10만겁의 전생을 거치고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 아, 난 얼마나 더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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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구분도 못하던 시절의 인연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구도자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이렇게 육십갑자를 다 산 후에야 깨닫다니. 글을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렸고, 아무리 진심을 다해 무리 속에 섞여보려 해도 어느 순간 마음을 다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탐욕과 집착을 벗어나지 못함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우리는 456억(오징어 게임, 2021, 황동혁 감독)이란 자본의 거대한 자석에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 넷플릭스 1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평들은 하나같이 우리 사회를 욕하고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말들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는 사회주의는 어떠한가? 그나마 개인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인류가 지금까지 진화하며 터득한 가장 나은 제도가 아닐까. 앞으로 수정 민주주의와 수정 자본주의로 거듭 진화할 것이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징어 게임 속 인간의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추악함을 논한 칼럼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모두 사회를 욕하고 제도를 욕하고 세상을 욕했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는데도, 그 게임 속의 인간들을 희생자라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장기판 위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쾌락을 위해 희생되는 희생자임을 암시한다. 그건 시즌2에서 증명할 문제다.

주인공 456번 성기훈은 민주주의이며 자본주의인 나라에서 밑바닥 인생으로 추락한 루저였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본성인 선함을 끝까지 잃지 않았기 때문에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난폭한 영화를 보며 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과 제도만 손가락질 한다. 그러니 어떤 바이블도, 어떤 불경도, 어떤 도덕경을 보여줘도 자신을 반성하거나 성찰하지 않는다. 자신 속에 있는 악마적 욕망을 극대화시키면서 자본의 물결에서 밀려나게 되면 세상을 향해, 사회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모두 네 탓이라고.

자본의 파도에서 밀려나는 순간이 내겐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남에서 20년 살다 성남을 거쳐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로 이사 왔을 때 비로소 나무와 강과 꽃과 풀이 보이고,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본에 꺼들리지 않으니 자유로웠다. 자고나면 억소리가 나게 매일 집값이 올라도 평온했다. 그 순간, 내게 고통을 준 인간들과 물질과 자본은 내 영혼을 위한, 내 글쓰기를 위한, 내 구도(求道)를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감사할 일이다. 간신히, 평화가 왔다.

최소한의 청빈한 생활을 하면 된다. 청빈과 청결. 검소와 겸허. 쉽지 않지만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호구를 해결하는 상담일 외는 속세를 떠난 듯 살면 된다. 모든 저녁 약속은 잡지 않는다. 많지도 않은 대인관계는 점심으로 돌렸다.

한평생 부와 권력을 쫓아가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불쌍해 보였다. 그들의 빈약한 정신은 죽을 때까지 남을 탓하며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나 자신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자신을 안다는 건 축복이다. 자신의 소명을 안다는 말이므로. 들판에 핀 꽃이 저택 정원에 핀 꽃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세상을 향해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된 시점이기도 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한 성철스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고, 너 자신을 등불삼고(자명등) 법을 등불삼아(법명등),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알 것 같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듯 탐욕과 집착을 놓았을 때의 평화를 안다. 쉽지 않다. 수행은 실패의 연속이다.

잉글랜드 수선의 키 작은 부부는 나 혼자 오랜 세월 아파하며, 외로워하며 깨달은 이치를 그들은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듯 고요히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그런 사람들을 대면할 때면 부끄럽고 부끄러워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 그들은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영혼으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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