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적하고 단순한 미니멀라이프가 좋다
십여 년 전 작품집 ‘낮술’을 출간했을 때 우연히 인터뷰를 한, 나보다 한참 어린 기자에게 호(號)를 지어 준 적이 있다. 필우(苾旴, 향기로울필 클우). 클우는 해돋는 모양을 말한다. 태양이 만물을 비추듯, 세상에 크게 향기로워라 혹은 세상에 크게 이로워라, 는 뜻으로 준 것 같다. 물론 사주를 풀어서 주역 괘상을 찾아 지어 주었다.
그는 내가 아는 ‘글쟁이 기자’ 중, 몇 손가락 안에 꽂을 만큼 재능이 있는 기자다. 붓글씨도 잘 쓰고, 음식 칼럼리스트이기도 하고, 서평도 기가 막히게 핵심을 잡아내어 잘 쓴다. 내가 ‘위대한 유산’을 받거나 로또에 당첨되어 거액이 생긴다면, 매체 하나를 만들고 싶다. 그때 반드시 이 기자를 모셔올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에는 SNS에 나전칠기를 한, 젓가락 사진을 올렸다. 도대체 이 사람의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싶었다.
- 필우선생! 갑자기 호를 부르고 싶어지네요. 멋집니다. 이쪽 길로 강추합니다.
댓글을 남겼다.
- 그저 잔재주를 좀 부려 본 겁니다.
그는 몸에 밴 겸손을 떨었다.
근데 작가님 호는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다. 호(號)? 호라. 호란 무엇인가. 호란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주로 시, 서, 화에 능했던 조선시대 학자나 사대부, 예술인들에게 널리 보편화 되었다. 학자들 간에 학문적 교류인 편지 교환이 일반화 되면서 이름보다는 호나 자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호를 받기도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 지을 경우는 자신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의 일면을 내포하는 경우도 많다.
남의 호는 많이 지어주면서 정작 나는 호가 없다. 호를 가진다는 게 어찌 사치스런 혹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간명지나 작명증에 두인(頭印)으로 사용하는 호는 있다.
서예가이면서 서각가인 지인 전시회에 갔다가 안면이 있는 어느 교수님이 정작가는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십니다, 하고 수인사를 하곤 아름다울 ‘가’자를 하나 드리고 싶네요, 했다. 그러자, 서예가가 받아, 정작가는 늘 현재가 아름답지요. 저는 현재 ‘현’자를 하나 주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가현(佳現). 십여 년 두인으로 쓰고는 있지만 누구에게 발설해 본 적은 없다.
늘 매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매화는 꺾어져도 꽃을 피우고, 속이 텅 빈 고목이 되어도 꽃을 피우고, 한설에도 꽃을 피운다. 그러다 얼마 전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로 이사를 왔다. 매산리(梅山里). 조선조 초기 어느 지관이 이 땅을 ‘매화낙지형’이라 해서 매산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 라는 뜻이다. 우연히 지인이 사는 동네의 아파트들을 둘러보다 지번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산리의 이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다 싶었다. 약간 언덕에 위치한 아파트임에도 마치 소쿠리에 담긴 듯 아파트가 아늑했고 조경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내 눈에는 숲 속의 아파트 같았다. 나중에 계약을 하며 이곳의 지번이 ‘매산리’임을 알게 되었다.
가락동 내 오피스텔과 불과 30분 거리지만, 한 순간 나는 매화 뒤에 숨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매은(梅隱)’이라는 단어가 씨앗을 내리고 있었다. 매산리로 이사오기 전에는 늘 인도의 인생4주기 중, 임서기에 접어든 생각으로 초은(草隱, 풀 뒤에 숨다), 혹은 차를 좋아하니 다은(茶隱, 차 뒤에 숨다)이라는 호를 쓸까 생각하고 있었다.
인도의 인생4주기를 현재에 대입한다면 30세까지는 공부를 하는 학습기고, 64세까지는 가정을 이루는 가주기고, 65세부터는 수행을 하는 시기(임서기)다. 인생을 돌아보고 생로병사를 생각하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기다. 인도에서는 가족을 떠나 숲에서 수행을 하며 지혜를 전파(유행기)하는 수행자를 존경한다. 지금의 아파트는 곧 임서기에 접어드는 내게 딱 맞는 곳이다.
야심한 밤, 요가를 하러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를 ‘초은’으로 할까, ‘매은’으로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다락같이 오르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영끌’ 대출을 했던 국민들이 이번엔 고금리에 테러당한 듯 속수무책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속세에서, 혼자 이렇게 고상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고민을 하고 있다니.
초은이 예쁘긴 한데 풀 뒤에 숨은 건 아니듯 하고, 매화꽃이 떨어진 자리에 은거한다는 뜻의 ‘매은’에 필이 꽂이긴 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일에 혼자 이리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니. 필우선생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명감이 나를 불태우고 있었다.
- 현재는 ‘가현(언제나 현재가 아름답다)’ 을 쓰고 있지만, 노년에는 ‘매은(매화 뒤에 은거하다)’을 쓸까 합니다.
답글을 달았다.
- 노년? 20년 후겠네요.
필우선생의 댓글이다.
20년 후라니. 나는 이미 노년의 문 앞에 서 있다. 손가락만 갖다 대면 열릴 문이다. 노년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인도의 사주기에선 임서기부터 노년이 될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은둔한다고 은둔이 잘 되지 않는다. 정말 오지가 아니면 전 세계가 인터넷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언제든지 SNS에 글을 올릴 수 있고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임서기라고 하고 ‘온라인에서만 논다’로 해석하면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이다. 멋진 배경이 될 것이다. 풍경이 아름다운 건 삼십대 중반, 파리에서 스위스까지 승용차로 횡단할 때 이미 알았다. 운전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졸다 깨다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도 가도 해바라기 밭이었다. 산은 보이지 않았고, 눈 가는 곳까지 벌판이었다. 그 벌판 가득 해바라기 꽃이었다. 고흐가 왜 해바라기를 많이 그렸는지 알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유럽의 벌판은 온통 해바라기밖에 없었다. 아,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은 없었지만, 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주인공의 배경이 되고 싶다. 육십갑자를 다 산 이후의 삶은 덤이라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이미 술병이 다 비었는데 누군가 우수리로, 덤으로 술 한 잔을 더 준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혹여 누군가 내게 법명을 준다고 하면 ‘적요(寂寥 : 적적하고 고요함)’로 달라고 하고 싶다. ‘여여(如如 :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도 탐나지만, 언제부턴가 적적하고 고요하고 단순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좋다. 호는 매은으로 하고.
적요한 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요가를 하며, 날숨과 들숨에는 관심도 없고, 숯불에 고기 되작이듯 혼자 법명과 호를 제멋대로 되작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노년의 문 앞에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재미를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필우선생, 제 호는 ‘매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