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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발우를 들고

발우를 들고 가만히 서 있자 깨끗한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발우(鉢盂)는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이다. 부처님은 발우를 들고 대중의 집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절대 밥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주인이 밥을 줄 때까지 기다렸다. 부처님 시대 승려들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장사는 물론 농사도 짓지 않았다. 후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아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면서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문득 요즘 내 생활이 발우를 들고 가만히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직업이 두 개다. 하나는 글쟁이고, 하나는 역학자(易學者)이다. 역학자는 역학에 능통한 사람이다. 역학은 주역의 내용을 기초로 음양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내가 공부한 학문은 명리학이다. 명리(命理)는 하늘이 내린 목숨과 자연의 이치라는 뜻이다. 명리학은 생년월일시, 네 기둥으로 이루어진 사주(四柱)에 음양오행의 원리를 적용하여 운명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미술학도였지만, 외로워서 글을 쓰다 보니 글쟁이가 되었고, 삶의 고난을 만나자, 오이디푸스처럼 나에 대한 신탁(神託)이 궁금해졌다. 신탁은 운명의 다른 말이다. 수많은 점쟁이와 역술가를 순례했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 직접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이젠 밥벌이 수단이 되었다.

운명을 본다고 해서 팔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운명을 푼 종이를 간명지(看命紙)라 한다. 간은 볼 간자를 쓴다. 운명을 본다는 뜻이다. 운명을 본다는 건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듯 명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면 그렇게 생긴대로 살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네모로 생겼는데 자꾸 둥글게 생기지 않았다고 화를 낸다. 급기야, 명리를 풀어준 나를 불신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대개 마음이 욕심과 물질로 더럽혀져 있어 내 말이 들어갈 틈이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그저 당신의 사주팔자는 이렇게 생겼다고 말해 줄 수밖에 없다. 팔자는 바뀌지 않는다.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네 기둥의 여덟 글자는 바뀌지 않는다. 팔자가 비록 오행이 다 없어 반듯하지 않아도 대운과 해운에서 보안하거나 배우자의 기운이 보안해 주면

큰 풍파 없이 지나갈 수 있다. 사주팔자는 관습적인 것이라 여자는 그저 남자 잘 만나 편하게 사는 게 좋은 사주로 여긴다. 남자는 관직에 나가거나 돈을 많이 벌어야 성공한 인생으로 여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후진국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하는 부류는 강남의 딸 가진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딸이 엄청난 공주의 사주를 타고난 걸로 착각한다. 옛날 왕정 시대 때의 공주는 놀고먹고 갑질이나 하는 신분이 아니었다. 나라가 환란에 처하면 국익을 위해 혹은 수교를 위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적국의 왕이나 왕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걸 교육 받고 자란다. 요즘 사람들은 공주라면 그저 놀고먹고 허영과 사치만 부렸다고 생각한다. 왕정시대의 공주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자들이었다. 해서, 그들에게도 녹봉을 주었다.

공주가 무얼 하는 신분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딸은 공주이길 원하는 여인들이 많다. 아무튼 그들이 생각하는 공주 사주가 아닌 딸을 공주로 착각하고 어디선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딸과 같이 노년을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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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벌은 외로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형벌이 사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생존과 맞닥뜨렸을 때였다. 할 줄 아는 건 책 보고 글 쓰는 일밖에 없었다. 글쟁이로는 생존이 해결되지 않는다.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이 있다. 우연히 만난 명리학이 발우가 되었다. 발우를 들고 서 있은 지 20년이나 되었다. 발우를 들고 가만히 서 있으면 사람들이 밥을 준다(상담료). 밥 보시를 받았으니 나는 승려는 아니지만 법 보시(그들의 운명을 보여준다)를 한다. 세상은 음양오행의 기운으로 돌아가니, 나쁜 오행의 기운에 있는 상담자에겐 ‘마음의 방향’을 바꿔 편안하게 그 시기를 지나갈 수 있도록 어드바이스를 한다. 좋은 오행의 기운에 있는 상담자에겐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그러나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신(神)이 가장 싫어하는 게 교만이다.

소유와 집착과 자본 증식의 욕망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늘 불안했다. 이렇게 누추하고 구차하게 사느니 그만 살아도 될 거 같았다.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굶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약 없이 하루도 잘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을 하루살이처럼 살아냈다. 그러다 불교를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게 욕심에서 비롯된 불안과 고통이었다. 그렇게 삼 년 쯤 출퇴근길에 유튜브로 부처를 만났다.

어느 순간 욕망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착하는 마음도, 자본을 증식하고 싶은 마음도, 소비욕망의 마음도, 시나브로 없어졌다. 인간에 대한 애착과 자본증식의 욕망과 소비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불안이 사라졌다. 종교(가톨릭)를 바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부처의 지혜(연기법과 제행무상)는 내게 평화를 주었다.

여태까지의 삶으로 봐서 한 번도 굶은 적도 없고, 밥을 먹기 위해 비굴하게 굴은 적도 없다. 그러니 그저 발우를 들고 가만히 서 있으면 된다. 어떨 땐 아주 오래도록 발우를 들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어떨 땐 발우에 넘치도록 밥 보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명절이 되면 누군가는 사과를 보내오고, 누군가는 배를 보내오고, 누군가는 귤을 보내온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선뜻 아낌없이 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명리학에 천을귀인, 월덕귀인, 건록암, 암록암이라는 말이 있다. 사주팔자에 이런 것들이 있으면 하늘에서 복을 받게 되어 지혜가 총명하고 만인의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 있는 길성 으로 본다. 한 마디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한다. 하늘이 돕고 신령이 돕는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에 선행을 베풀며, 복을 조금씩 저금해 둔 것들이 그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선행은 꼭 물질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죽고 없으면 자신의 DNA를 받은 후손에게 그 복은 돌아간다. 동기감응(同氣感應). 같은 기를 가진 것끼리는 감응을 한다는 뜻이다. 권세가들이 길지에 묏자리를 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손들에게 그 땅의 좋은 기를 주려고 칼부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대부분 삶이 고달플 때 사람들은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 자신의 사주팔자를 알고 나면 위안이 된다. 아, 나의 신탁의 모양은 이렇게 생겼구나.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운명. 그 운명을 사랑하면 된다. 마음이 맑고 순순한 사람은 금세 알아듣는다. 그러나 마음이 탁하고, 욕심으로, 욕망으로 흐려져 있는 사람은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두배 세배의 에너지가 소모 된다. 잔꾀를 부려 눈앞의 이익을 좇으면 금세는 잘 산다. 그러나 남을, 한 생명체를 가슴 아프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면 결국 그 나쁜 기운은 부메랑처럼 그 자신에게 돌아간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처님처럼 발우를 들고 가만히 서 있자, 비로소 새순이 돋아나듯 깨끗한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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