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임을 이래서 안다
TO HAVE or TO BE(소유냐 혹은 존재냐).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다. 젊은 날 엄청 폼 잡으며 들고 다닌 책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오만한 책을 방패삼아 나의 오만을 키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의 오만이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학창시절부터 또래 여자애들이 가지는 관심사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녀들은 돈 많은 남자나 직업이 좋은 남자, 다시 말해 부와 권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는 게 최고의 화제였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얘기 같다. 그런 남자에게 시집가려면 외모나 조건을 잘 포장해야 한다는 걸 그녀들은 알았다. 조금씩 속여 가며 서로 정보를 주고받느라 무리지어 다니는 새떼들 같았다. 당연히 그녀들은 소유적 인간 유형이었다.
가장자리의 푸른곰팡이처럼 늘 저만큼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과는 다르다는 오만. 문득 철이 들면서 깨달은 느낌이었다. 그즈음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난 ‘존재’적 양식을 쫒는 인간 유형이었다. ‘소유’적 양식을 쫒는 인간을 누추하게 여겼다. 그게 나의 오만이라면 오만일 것이다. 누군가와 말은 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하고 싶으면 밤에 ‘비밀일기’를 썼다. 존재적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그 습관이 여태도 이어져 이제는 전 세계가 공유하는 SNS에 ‘공개일기’를 쓰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먹어도 퍽퍽하고 맛없는 빵처럼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내 속에서 섬유질이 소화되지 않은 채 명치에 걸려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 때의 그 책은 없다. 그렇다고 신국판을 사서 읽고 싶진 않다. 독서 취향이 점점 고약해져서 맛없고 섬유질이 센, 소화 못할 것 같은 책은 안 본다. 그 동안 소화도 못 시키는 질긴 책을 많이도 보았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삶은 그만큼 소외된다.
SNS에서 에리히 프롬의 이 문장을 본 날은 공교롭게도 낮에 고등학교 동창 A와 B를 만나고 들어온 날이었다. 잘 먹고 잘 놀다 왔는데, 속절없는 우울함이 내 정신의 한 귀퉁이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외롭지도 않고, 간신히 부럽지도 않고, 간신히 평화롭고 자유롭다’고 미리 세 번째 산문집 작가의 말까지 다 써놓았는데, 새삼 이런 눅눅한 마음이 낯설었다.
- 우리 수준 좀 높은 얘기 하자. 럭셔리하게.
A는 말끝마다 럭셔리하게를 외쳤다. A는 그림을 잘 그렸다. 아버지가 시장에서 큰 포목점을 해서 돈이 좀 있는 집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하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고, 선을 봐서 그녀 집 보다 돈이 더 많은 섬유공장 집 아들과 결혼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분명 그녀는 나와 친구였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붓을 놓으면서 나와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바라보던 별이 예전에는 같았는데, 어느 순간 달라졌다. 바라보는 별이 달라졌다고 이미 친구인 친구를 절연할 수는 없다.
B는 자영업을 하는 친구였다. 경기가 점점 나빠져 가게를 운영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며, 가게를 넘기고 싶어도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월세 받으면 되지 왜 가게를 팔려고 하니?
A가 말했다.
- 내가 월세를 내고 있는데 무슨 월세를 받아?
B가 물정 모르게 말하는 A를 흘낏 보며 말했다. 이 순간 돌부리에 걸린 듯 삐꺽한 건 B가 아니라 나였다. A가 그림을 그리던 시절, 돈만이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아버지와 불화하던 시절,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없던 아픈 가슴이던 시절, A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눈물과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한 친구였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는 일 년에 한 두 번 보는 사이로 변했다. 아이들을 키우고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까지도 A는 남의 배고픔과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아는 친구였다. A는 변한 걸까. 원래 본성이 그런 친구였나.
- 이율이 높아질까 봐 걱정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부동산 담보대출이야기가 나와 내가 한 말이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서 결혼한 젊은 영끌족 얘기였다.
- 아들이 대출을 써고 있단 말이니?
A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짝 놀란 듯이 내말을 냉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포장하느라 바빠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 남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오나 보네. 수도권 아파트에 살면서 대출 없는 사람도 있나?
그렇게 말을 한 후부터였을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하나 떨어진 듯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 넌 이제 그림은 안 그리나 봐?
B가 물었다.
- 그림 그리는 것도 다 돈 벌려고 하는 짓 아니니?
A의 답이다. 모든 예술가들을 돈으로 환산했다. 팩트 폭력이다. 그러고 보니 A의 오른팔에 중국 부호들처럼 굵은 금팔찌와 가는 금팔찌 두 개를 끼고 명품반지도 손가락 두 개에 꼈고, 왼팔에는 로렉스 두윈 시계와 알 굵은 흑진주에 다이아몬드를 돌려 세팅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너 팔 잘리겠다 조심하라고 농담을 하자, 집에 있는 걸 어떡하니 하고 다녀야지, 하고 말했다. 밥은 A가 샀다. 잘 먹고 잘 놀다 집에 왔다.
그런데 이 남루한 마음은 뭐란 말인가.
A와 서서히 멀어진 이유를 복기해 보았다. 아이들이 일찍 유학을 가버리고, 마음고생을 시키던 시어머니가 죽고 나자 그녀에겐 더 이상 아픔이 없는 듯 했다. 아니 더 이상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언제 그런 비루한 감정이 있었냐는 듯이 말하고 행동했다. 너무 있는 티를 냈다. 너무 상류층인 척 굴었다. ‘존재’적 인간인 줄 알았는데 A는 원래 ‘소유’적 인간이었나 보다.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치 영혼이 없는 AI와의 대화처럼 공허해진다.
젊은 날 보았던 나의 별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며 여기까지 왔다. 나의 별은 문학이라는 성지(聖地)였다. 그리움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일까. 문학에 대한 그리움으로 온몸이 파랗게 타 오르곤 했다. 늘 얼음 위에서 자는 사람처럼 불편한 잠 속에서 님을 만나듯 문학을 만났다. 어느 듯 세월은 흘렀고, 문득 노쇠한 한혈마가 초원을 그리워하듯, 밤새 파란 발광체처럼 글을 쓰던 때가 그립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있어도 몸 안에 환한 등불을 밝힌 듯 아름답게 빛난다.
A의 희망은 무엇일까. 더 많은 자본을 소유하는 것일까. 한 때 그녀도 몸 안에 등불을 밝 힌 듯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별을 부(富)와 바꾸었다. 이제는 사랑하던 남자 때문에 아팠던 기억을 전생처럼 잊어버리고, 외형이나 조건만으로 충족되는 것을 사랑으로 여긴다. 사랑이란 사막의 물처럼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쩜 물질적 풍요일지도 모른다. 그 풍요가 어느 날 사라진다면 어떨까. 그녀는 무엇으로 존재할까?
의식주를 해결하고 가족을 잘 건사하는 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소유에 모든 가치를 두는 인간 유형은 자신보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이 있는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고, 없는 자 앞에서는 교만해진다. 비굴과 교만 사이를 오고간다. 또한 소유한 것을 잃을까봐 돈벌레처럼 전전긍긍하며 산다.
젊은 날 에리히 프롬을 만나면서,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하다 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았다. 하여, 끝임 없이 공부하고 글을 썼다. 이번 생은 글쟁이의 삶이구나 싶었다. 어느 날 문득, 외롭지도 않고, 부럽지도 않고, 평화롭고 자유로웠다. 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게 하는 게 나의 몫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A를 만나고 온 날은 청정하지가 않았다. 마음이 남루한 게 아니라, A의 교만에 화가 났던 것이다. 아, 아직도 이따위에 화가 나다니. 돈오돈수(頓悟頓修, 한순간에 깨달음을 완성하다)는 성철스님에게나 해당되나 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았다 해도 끝임 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지눌스님의 말씀에 더욱 공감한다.
부자친구를 만나면 줄 수 있는 게 없다. 다 가졌고, 다 가질 수 있는데 무엇을 준들 감사하겠는가. 그래서 그런 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허해진다. 사랑이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임을 이래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