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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 Oct 15. 2021

공무원이 '직장 내 괴롭힘'을 언급하면 생기는 일

공무원으로 일하는 법(6)

처음 시작은 나에 대해 팀원들이 욕을 하고 다닌다는, 같은 팀의 다른 층에서 일하는 팀원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모뻘 나이의 팀원은 나에게 팀원들이 '너에 대해 욕을 하고 다니니 행실을 똑바로 해라'.라고 전해주었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말인가? 생각을 해보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 말에 압도되어버렸다. 


네 욕하고 다녀, 조심해. 트집 잡히지 않게  


나의 앞에서 나에게 웃으면서 나의 뒤에서 나를 까고 다니는 팀원들과 함께라니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싫으면 싫은 티라도 냈다면, 그렇게까지 잘하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자책을 하게 되었다. 


40대가 되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친다고 한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도 모르는 호르몬 변화에 의한 알 수 없는 질투가 솟아난다고들 한다. 


내가 있던 팀의 대부분의 연령대는 높았다. 


공무원은 야근은 물론 주말출근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원들은 내가 일도 하지 않고 남편과 놀러를 다닌다고 말을 하고 다녔다. 참 억울한 일이었다. 뜬금없는 가족의 소환이라니. 하기 싫은 일이라며 나에게 미뤄놓고, 나 혼자 남아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했다. 


다른 부서에서 우리 팀에 귀찮은 일을 떠넘겼을 때도 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되었다.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는데도 나에게 디자인 업무를 맡겼다. 그 일을 끙끙대며 하느라 나는 밤 10시가 넘도록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나의 이러한 상황을 팀장에게 보고 했을 때 그는 나몰라라 하며, 퇴근도 찍지 않고 관내 헬스장으로 운동을 하러 갔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출장은 당연 내 몫이 되었다. 팀원들은 아이들을 핑계로 다 빠져나갔다. 

아이가 없는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나의 옆 주사는 나와 같은 계약직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먼저 들어와 선임이었고 모든 것이 그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시아버지가 그 기관에서 퇴직을 하신 분이었고, 그녀의 재계약 시즌마다 시아버지가 인사과가 있는 사무실을 다니면서 인사를 했다.(정확히는 받았다) 그 퇴직한 공무원 시아버지는 재개발될 곳에 땅이 있어서 보상을 크게 받고 아들 집이 있는 땅과 본인이 있는 집, 그리고 경기도에도 땅을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진짜)


'전관예우' 


그것은 판사 검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역사회에서의 공공기관은 아직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렇게 실세를 등에 업고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을 예정인 그녀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바로 무심한 남편이었다. 벼락부자가 된 시아버지를 믿고 남편은 회사를 밥먹듯이 그만두었다. 까고 배짱으로 회사에 주 5일 중 3일 만을 출근하겠다고 통보한 적도 있다. (매번 그런 듯)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집에서 쉬는데 아이를 돌보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직장 내 어린이집으로 뛰어가고는 했다. 나의 남편의 다정함을 시기질투했다. 그녀는 나보다 1시간이나 먼저 퇴근하고, 당직이나 재난구호에서도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는 만족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말 바꾸기를 하면서 나와 다른 팀원과의 오해가 생기게 말을 만들고 이간질을 하더니 나는 결국 고립되었다. 


나는 눈을 뜨고 싶어지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밥도 혼자 먹고 일도 다 떠안았다.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부르고 나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갈 때에도 견뎠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까 봐 아득바득 참았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감시를 받게 되었다. 옥상에 잠깐 바람을 쐬러 가기도 힘들어졌는데, 더 도망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출근하는 길에 사고가 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말로 하는 괴롭힘은 점점, 

나를 툭툭, 몸을 건드리고 치기 시작하는 신체적인 영역으로도 들어왔다. 


직장 내 괴롭힘? 그게 네가 잘 못하는 건 아닐까?


휴직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휴직을 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신청을 하면 한 달 후에나 처리가 된다고 했다. 적어도 한달전에는 신청을 해야한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보통 남은 연차를 써서 휴가를 가거나 병가를 간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휴직을 하기 앞서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팀장에게 상담을 했다. 나는 2개월에 걸쳐 3번의 상담을 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결국 "너만 힘든 거 아니다. 참아" 였다. 일하는 사무실의 층을 바꿔달라는 얘기도, 계약직이라 팀을 바꿀 수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 팀장도 오기 싫었던 부서에 와서 기간만 채우고 빨리 다른 팀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었다. 자신이 있을 때 팀원이 휴직을 하는 일, 더구나 '직장 내 괴롭힘'과 같은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것이 귀찮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참아"라는 말이 "내가 있는 동안에는 하지 마. 내가 가고 나면 그때 하던지 그때까지 참아."로 들렸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 나도 힘들다
 휴직? 해볼 수 있으면 해 봐"  


나는 결국 다른 교사 공무원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조사하여서 의사의 진단서를 끊고 팀장에게 다시 한번 면담 신청을 했다. 


스스로 준비하는 사이에, 인사팀 직원을 만나 제출 서류를 확인했다. 

팀장과 면담을 통해 의사를 밝혔다고 생각한 나와 달리 팀장은 내가 휴직에 대한 의사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팀장도 아니고 차장이 내가 팀에게 말도 안 하고 인사팀에 쫓아가서 휴직을 한다고 했다고 난리를 쳤다.

  

얼마 후, 과장님이 팀원 전체를 불렀다. 

사무실 여러 개가 틔여 있는 그곳에서 나는 과장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나를 지목하지 않았지만, 왜 몇 사람이 사무실 분위기를 흐리냐며 팀 전체에게 소리를 질렀다. 과의 타 부서 사람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나마 나와 연관이 없어서 종종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사람들도 게눈 감추듯 없어졌다. 


나는 그렇게 완전히 고립되었다. 

공무원사회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들먹이면 벌어지는 결과다. 


생일 며칠 전, 나의 휴직 날이 결정되었다. 


휴직을 하는 날에는 팀장과 차장 대부분의 상급자들이 다른 사무실에 놀러 가있었다. 마지막 출근의 퇴근시간까지 남은 직원조차 나의 인사를 씹었다. 마지막 날까지 나에게 테이프나 비품을 훔쳐가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나의 책상과 서랍을 뒤지는 그녀들이 징그럽게 싫었고, 무서웠다. 


"비품 가져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씨 여기 있던 테이프 가져가지 않았어?" 

"박스 테이프 1개 양면테이프 1개 여기 있습니다"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면서 가져온 박스테이프와 양면테이프였다. 나는 내가 근무하기 전에 내 자리에서 근무했던 분이 왜 팀원과 사이가 안 좋은지 알게 되었다. 


휴직을 해서 나오는 날은 내 생일 며칠 전이었다. 

달에 몇 번씩 생파를 하는데, 그중에서도 과전체가 모여서 생일인 사람에게 상품권을 전달하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과에 모든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불안해서 과 서무에게 나는 휴직자니 상품권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다른 팀원이 올 때까지 1주일 동안 집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차장은 끝까지 나에게 네가 휴직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아냐며, 팀장님이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 줄 아냐며 휴직은 해도 일은 해야 한다고 강압적으로 나왔다. 


휴직을 하겠다고 선언한지 꼬박 2달이 지나서야, 나는 휴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은 스노우볼 


불안은 스노우볼 같다고 한다. 불안을 끌어안고 걱정하며 마음을 뒤 흔들수록 정신이 없어진다. 스노우볼을 잠재우고 싶다면,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직을 해서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눈을 뜨기 싫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나는 다시 출근을 해 있었다.


나는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계속 그 장소, 그 시간 속에 있었다. 


'내가 그때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

'내가 그때 더 싹싹하게 말을 했더라면, '

'내가 그때 더 트집 잡히지 않게 했더라면, '

'내가 적응을 더 잘했더라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놓고 '어쩌면', '만약에' 빠져 내가 휴직을 하게 된 것이 내 탓은 아닐까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어려움을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 나왔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깨어있는 동안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밥값을 못해서 밥을 먹을 이유가 없다고 느껴졌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활동성도 없고 햇빛도 보지 않아 더 우울해졌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살아있지만, 

살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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