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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ageulp May 08. 2023

새벽이 밝아졌다.

수영장 가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계절

새벽수영 일기 2


하루를 길게 시작하는 계절이 돌아오다.

 봄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개나리보다 아니 개나리보다 먼저 핀다는 히어리(국내 자생종) 보다 더 빨리 알려주는 것이 바로 새벽 밝음이다. 새벽이 점점 밝아오는 건 지구가 자전하고 있음을 느끼는 동시에 계절이 한 차례 변할 때가 되었음을 시각적으로 먼저 인지시켜준다.

겨울의 새벽수영은 어둠 속을 뚫고 수영장에 가서 다시 어둠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에는 바람마저 매섭고 차가워서 사람들의 인적이 더 적게 느껴진다. 왠지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보내는 이 시간이 나에게만 주어진 거 같아 들키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수영장에 도착하면 어둠 속 어딘가에서 나타난 회원들이 북적대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나만 홀로 일어나 새벽을 시작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들 부지런하구나 하며 매일 같이 감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이사 오기 전에 다녔던 수영장은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수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하는 새벽 밝음과 바깥공기의 차이를 계절마다 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수영장으로 갈 때가 밤이었다면 수영을 마치고 나왔을 때 아침이 되어 있는 계절이 바로 봄이다. 반쯤 뜬 눈으로 털레털레 수영장을 향할 때는 몰랐는데 수영을 마치고 센터의 문을 나서면 움트기 시작한 나무들로부터 파릇파릇한 생명력이 전해진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수영으로 쏟아부은 에너지가 다시금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특히 마주치는 사람 보다 봄꽃을 더 많이 마주치는 어느 날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벚꽃잎들이 양탄자처럼 깔려 핑크빛 물결을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평소 같지 않은 말랑말랑해진 감정에 별거 아닌 것에도 설레게 된다.

 이사 후 다니기 시작한 수영장은 지상에 있다. 수영장 삼 면을 에워싼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하는 수영은 지상 수영장만의 특권이다. 특히 4말 9초(4월 말, 9월 초)가 되면 내가 다니는 지상 수영장에서는 강습 내내 떠오르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수영을 하게 된다. 오렌지 빛 태양이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며 같은 강습반 회원 한 분은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평영과 접영을 할 때는 태양과 눈싸움을 벌이게 된다. 물론 절대 내가 이길 리 없는 이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고맙게도 블라인드가 슬며시 태양을 가려주어 게임을 종결시켜 준다.

 이제 여름의 문 턱 앞까지 오게 되면 눈을 뜨는 순간부터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 밝음이 커튼을 통과해 거실을 밝혀준다. 그러면 혹시 늦잠을 잔 건 아닌지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게 된다. 환해진 새벽은 일어나자마자 나온 꾀죄죄한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혹여나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까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게 된다. 그럼에도 새벽의 출발선이 빨라진 여름은 같은 시간대지만 겨울날 어둠 속에서 무겁게 깨어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괜스레 더 부지런을 떨게 만드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바쁜 일상 속에서 한 달이 언제 넘어갔는지, 계절은 도대체 또 언제 바뀌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왔다. 하지만 새벽 수영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사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었다.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것을, 날이 추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지만 그 잠깐 동안에 온몸으로 느끼며 매일의 변화를 감지한다. 언제 불쑥 왔는지 몰랐던 계절은 머물러 있다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매일 다르게 아주 조금씩 변하면서 때가 되었을 때 드러난 것뿐이었다.

부지런히 새벽 수영을 다니다 보니 부지런한 하루를 만나게 되었고, 부지런한 하루는 또 다른 부지런한 하루들과 이어져 부지런히 변하는 계절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새삼 모든 것에는 갑작스러운 것이 없고 작지만 미세한 변화들이 모이고 모여 각자의 계절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나는 언제 저렇게 자유형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호흡하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히 배워나가다 보니 어느덧 처음 수영할 때 부러워했던 회원들만큼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된 거처럼 우리도 각자의 작은 부지런한 삶의 조각들이 모이다 보면 나의 계절, 당신의 계절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인스타그램 | @su0break

글 | 라라글피

(C) 2023. 라라글피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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