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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Feb 08. 2021

지극히 사적인 런던 탈출기.

런던은 잘못이 없다..



줌 아웃~

점점 멀어져 간다. 이때만 해도 친했었는데..

잘못된 것은 없다. 상황이 달라졌을 뿐.

그때도 옳고 지금도 옳다.  

   

줌 인~

아들과 나는 친했다. 대략 5년 정도. 카페에서 같이 작업도 하고, 국내 여행, 해외여행도 다니고, 아침저녁 산책도 같이했다. 엘리베이터에서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자주 마주치는 주민들이, 언제나 같이 다니는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지레짐작도 했지만, 때마침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대단지 고층아파트의 새 입주자들은 예전처럼 앞집, 뒷집, 옆집,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마음속 자유로운 생각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삭막했지만 그나마 훅 치고 들어오지 않는 요즈음 세태가 그 당시 내겐 편했다.

유일하게 인사를 하고 지내던 단지 내 요구르트 아줌마만이. “아이고 복도 많으세요. 아들이 엄마와 산책도 다니고.. 요즘 다 큰 아들이 누가 엄마랑 놀아줘요” 하며 아는 체를 했지만가끔, 그때마다 “아 그런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하곤 뒤돌아서 중얼거렸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때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끔 매체에서 보던 샴쌍둥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언젠가는 분리 수술이 필요한.

   

  

장례, 결혼문화가 그 나라의 기후와 지리적 여건,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나  문화에 따라 다르듯이, 눈에 보이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배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와 아들의 친함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

아들은 중학교 때  강박 증상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힘들었던 6년을 마치고, 5년을 쉬었다 대학에 들어간 아들은 졸업을 하자마자 갑자기 런던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증상도 좋아지고,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여, 정 힘들면 몇 달 지내다 오겠지 하는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보냈는데, 우려와 달리 아들은 어학연수 후 대학에 입학하고, 4년여를 생애(지금까지의 생) 최고의 시절을 보내는 듯싶더니..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중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 해 겨울, 아들과 연락이 됐다 안 됐다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연락이 끊겼고, 사방팔방 수소문을 하던 중, 아들과 셰어 하우스를 하던 친구의 페이스 북을 통해 아들이 입원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식에 우리 부부는 남편의 환갑 기념으로 준비했던 남미 여행을 취소하고 런던행을 예매했지만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 지옥 같았던 기다림의 시간을, ‘병원에서 잘 지내겠지’, ‘우리를 보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하며 애써 마음은 진정시켰는데, 도착해서 본 아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폐해져 귀국 비행기는커녕, 퇴원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부터 현지인도, 여행자도 아닌 환자의 보호자로, 정해진 시간에 하루 두 차례 면회 가는 것, 가서 아들을 만나는 것(아들이 자거나 증상이 심할 때에는 면회를 할 수 없었다.)이 전부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이주 정도 머무르다 회사일로 먼저 귀국했고, 나는 혼자 남아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되도록 빨리 돌아가는 것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아는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말 한마디 할 사람도 없는 곳. 내가 서투른 영어로 무언가를 요청하고 물어볼 때마다 그들은 통역을 불렀고, 절차를 따졌고, 의사의 스케줄을 들먹였다. 종종, 그들끼리의 대화, 웃음, 경쾌한 걸음걸이는 마치 림보의 세계에서 내려다보는 전생처럼, 낯설고 서글퍼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몇 달 전 가을, 아들의  가이드로 여행했던 아름답고 활기찬 런던은 이제 이 세상에서 제일 차갑고 냉정한 도시로 변해 있었다.

아들은 극과 극을 오갔고, 아들에게 빙의된 나도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46일째, 비행기 오픈 날자 마감 하루 전, 택시를 타고 히드로 공항에 내렸지만 안내를 해야 하는 아들은, 수하물 줄을 벗어나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나는 커다란 트렁크 2개를 버려둔 채 '헬프 미'를 외치며 아들을 찿아다녔다. 이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런던 집으로도 돌아갈 자신이 없는 절박한 상황, 다행히 아시아나 항공 한국 직원의 도움으로 절차를 마치고, 최대치의 복약으로 아들을 제어하며 우리는 그 비행기의 마지막 탑승객이 되었다.

긴장되고 절박했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던 런던 탈출, 그때만 해도 금방 다시 돌아가서 복학하고 졸업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후는 예상보다 심각했고, 어느새 2년 내의 복학 기간도 지나버렸다. 그다음 해, 남아있는 은행계좌 정리도 하고, 인사도 못하고 떠난 친구들도 만날 겸, 아들과 나는 다시 런던으로 향했다.

3년 전, 악몽 같았던 히드로 공항을 방문자의 시선으로 느긋하게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애증의 도시에 또다시 발을 디뎠다.

      


이제 아들은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자유, 이 참에 나도 독립을 꿈꾼다. 빙의되지 않는 각각의 자유.

그 자유의 기본값인 외로움에  단짝 친구인 허전함, 허무함이 끼어들고, 나는 잠시 제켜 놓았던 그 느낌에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상실로 채워져 있던 속을 비워내고, 쓸고 닦고,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 여정에 불쑥 끼어드는 시차를 잃어버린 감정들로 잠시 지체되더라도 이제는 돌아갈 연습을 해야 한다.

그땐 아들과 친했고, 이제는 나와 친해져야 한다.


     

앨범을 뒤적이다 보면, 어김없이 서성거리는

곳이 있다. 

갑자기 서늘해지는 뒤통수에  뒤돌아보게 되는 곳, 

47일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격리되어 있었던 런던의 아들 방.

이 창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비가 내리고.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 위로 다람쥐 가족이 오르내리고,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원수처럼,  담벼락 위의  길고양이들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느라 한 치 양보 없이 가르랑 거리고,

길 건너집 뒤뜰에서 소꿉장난 하는 아이들, 그 사이로 펄럭이던 빨래,

매일매일 비슷한 듯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기도 싫었던 그곳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

미운 정이 더 떼어내기 힘든 것일까. 

화해의 제스처로 그 풍경을 그린다.

지워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시간의 품에 싸여 희미해지듯이, 그리다 보면 이 도시의 애증도 옅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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