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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Jan 29. 2021

야매 엄마의 뒤늦은 육아일기.

-육아는 계속된다.

    

쿨 하기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일 년에 4번(추석, 설날, 남편 생일, 아들들 생일, 내 생일은 패스)가족이 모여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한 번인 남편의 생일, 가족 행사에 별 관심이 없는 독립한 아들에게  수차례 미리 언질을  주었더니 , 생일 전날 저녁에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집에 올 때마다 차가 밀린다, 피곤하다 핑계를 대며 밥시간에 맞춰 오기도 힘들어하던 아들이 미리 와서 자기까지 한다니, 조금 의아했지만, 철이 좀 들었나.? 기분 좋은 착각도 잠시, 온다는 날 저녁 늦게 전화가 왔다. 피곤하다며, 역시나 내일 점심때쯤 오겠단다. 혹시나의 단짝은 역시나가 맞다.


다음날 일찌감치 수산시장에서 장을 보고 대강 손질을 해놓은 후, 거실에서 연일 나 좀 봐달라고 아우성인 대파를 그리기로 했다.

수경재배의 한계상 파는 이미 식탁에 올라와야 하는 유효기간을 지나 있었고, 겨울에 푸르름을 선물했던 파에게 마지막(?)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영정그림?)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는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함이었는데, 효과는 직방이어서 시간은 도둑맞은 듯 흘렀고, 역효과로 오히려 아들이 일찍 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고맙게도(?) 아들은 점심도 지난 4시쯤 와서 언제나 나만 보면 하는 말 3종세트중 한 가지, 배고프다고 한다, (다른 한 가지는 ‘피곤해’, 어렸을 때 하던 '심심해'까지 3종 )

저녁을 잘 먹기 위해 간단히 요기를 하더니, 형과 아빠 생신 선물을 사러 간다며 또 한 번 감동을 준다.

(감동에 목말라 별것도 아닌 것에 감동을 한다.)

그동안 나는 수산시장에서 사 온 산 낙지, 문어, 과메기를 손질하고 조개탕의 조개도 해감하고, 바로 식탁에서 끓여 먹을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아들이 선물로 사 온 와인으로 건배도 하고, 아들의 여친만 빠진, 4 식구가 오붓하게,  같기도, 다르기도 한 견해들을 그럭저럭 들어주며, 오랜만에 별 탈 없이  생일밥을 먹었다.

사실 아들도 손님이지만, 아들의 여친은 진짜 손님 같다.

차림도 신경 쓰이고 그릇 하나, 하다못해 수저도 새것으로 준비한다. 자식을 출가시킨 선배 엄마들이 '원식구'만 있는 지금이 좋을 때라고 하던 말이 오늘에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낯선 사람과 가족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이 안되지만 결혼은 안 한다니 미리 상상할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영양 보충했다는 아들의 덕담에 어깨, 허리의 통증이 사르르 사라지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 무렵, 갑자기 큰아들이 삼청동에 가야 한다며 옷을 갈아입는다.

남들이 들으면 삼청동에 사무실이라도 있는 줄 알겠지만, 삼청동은 큰 아들이 썸을 타고 있는 여자의  가게가 있는 곳이다. 아들은 그녀가 부르면 밥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내던지도 달려 나간다. 지난번 작은아들과 여친이 왔을 때에도 그녀의 문자를 받고서는 손님들을 내팽개치고 뛰쳐 나갔다. 그래도 그땐 저녁 무렵이었는데 이번엔 10시가 다 된 시간. ‘너무 늦은 시간이다’ ‘밀당을 해라’ ‘싸 보인다’ '3번 만나고도 아니면 아닌 거다’ 마지막으로 쇄기를 박는 남편의 ‘못난 놈’.(자기 젊은 시절은 다 잊어버린 듯), 각자 한 마디씩  내뱉는, 충고를 위장한 질책은 이미 뛰쳐나간 아들의 뒤통수를 비껴 허공을 맴도는데 남의 연애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질을 하고 있는 우리가 우스워졌다.

사랑의 방해꾼이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한다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가 아니던가.

      

새벽동이 틀 무렵에야 자는 올빼미족인 둘째 아들이 과연 남의(?) 집에서 잘 수 있을까.

욕조에서 전신욕을 하고, 안마의자로 몸을 풀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반의 잘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역시나 아들은 잠이 안 온다며 내 방문을 차례차례 노크하며 스탠드를 찾고, 베개가 낮다며 베개를 바꾸고, 새벽 2시에 배가 고프다며 딸그락 거리며 호박죽을 데워 먹었.

12시까지 온다던 큰아들은 새벽 2시쯤 오겠다고 톡을 하더니, 2시, 3시가 넘도록 감감,  4시쯤에 자기가 무슨 나그네인 줄 아는지 ‘하룻밤 자고 갈게’하는 톡을 보냈다.

옛날로 치자면 노총각도 한참 지난 나이, 어쨌든 '남의 연애사'. 그제서야 나도 잠을 청하며 누웠다.

잠시 잠이 들었을까. 카톡 소리에, 큰 아들이 들어온다며 보냈거니 하고 열어봤더니, 잠이 안 와서 자기 집에 왔다는 작은 아들의 톡이다. 어차피 내일 반찬 배달도 할겸, 태워 준다고 했건만 아들은 밤새 잠 못 자고 뒤척이다 새벽 첫차를 타고 자기 집으로 간 모양이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는 탓하기. ‘이제 집에서 안 잘래’. 그럴 줄 알고 아무도 안 권 했건만.

    


오늘도 두 아들이 교대로 난리를 쳤지만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두 살 터울인 아들들은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

하나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다행히 다른 하나는 칭찬받을 짓을 하고, 하나가 팔이 부러지면 다른 하나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숙제는 물론, 등하교까지 시켜줘야 했지만 그나마 동시에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n분의 1, 흔한 말로 반까이는 했다고 자위. 자족하는 습관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정해놓고 보는 tv 프로그램은 없지만 가끔 리모컨을 돌리다 ‘금쪽같은 내 새끼’가 나오면 시선이 멈춰진다.

육아를 졸업한지 에저녁, 조모 육아기에 들어설 연배가 되었지만 그 프로는 마치 오답노트처럼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무엇이 잘못된것인지, 그럴땐 어떻게 해야 는지. 오답을 알면 다음번에는 틀리지 않을텐데 이제 그 답도 유효기간이 지나버렸다. 언젠가 큰아들이 했던 말이 늘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엄마의 사랑이 필요했던 때엔 엄마가 안보이더니  지금은 없어도 되는데 왜 그리 잘해주냐고. 

육아는 끝나지 않았다. 방향이 조금 바뀌었을 뿐, 뒤늦은 육아는 계속되고 있다.

너희들 때문에’를 입에 달고 살았던 야매 엄마는 이제 '너희들 덕분에 만회 수를 두고 있다.

수업시간에 딴짓하다가 방과 후 '나머지 공부'를 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이제야 슬슬 '공부'에 재미가 붙는데 늦되는 엄마를 기다릴 수 없는 아이들은 독립을 꿈꾸고 있다.  

날은 저무는데 아직 팔아야 할 물건은 많이 남아 초조한 장사꾼, 이럴 땐 적당히 파장하는 것도 장사의 한 수다. 이참에 나도 슬슬 파장 준비를 해야겠다.

아쉬움이나 후회는 약방의 감초처럼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 이번 생에서는 그만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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