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여행하다.

by 한정선


모든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누구나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 나에게 꽃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풍경을 돋보이게 하는 일종의 ‘배경’이었다.

집, 가게, 건물을 꾸미는 인테리어의 하나로, 또는 예식이나 행사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굳이 찾지 않으면 지나쳐버리는 소품일 뿐이었다.

다달이 변하는 햇살과 바람처럼 계절 따라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당연한 일,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마음속까지 들어오지 않는 피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봄이면 꽃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거울아 거울아 누가 더 이쁘니’ 시샘하듯 꽃밭에서 꽃받침 포즈를 취하며, ‘예쁘다. 예쁘지?',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내겐 호들갑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꽃은 원래 이쁜 거야' 시니컬한 내 반응에 반박도, 수긍도 못하고 머쓱해하던 사람들의 표정.

꼭 그렇게 초를 쳐야만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땐 그랬다.

조금 젊었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았고, 내 속의 너무 많은 '나'로 인해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누구나'의 프레임에 끼이기 싫은 반골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어느 날, 꽃이 내게 들어왔다. 동그란 눈으로, '어디 갔다 이제 왔니?'라고 질책하듯 묻는 말에 나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야 돌아왔다고 조금 식상한(?) 화답을 했다.

개화는 신기한 마법이었다. 꽃눈이 생기고, 봉오리가 맺히고, 어느새 꽉 다문 잎사귀들이 한잎 두잎 피어나는 것은. 마치 땅속에 마술사가 있어 꽃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다달이 피고 지는 꽃은 내게 새로운 여행지가 되었다.

마법의 속성은 언젠가 풀린다는 것. 꽃이 영원하다면 그토록 아름다울까?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지는 꽃도 아름답다.

탄생, 성장뿐 아니라, 소멸, 재생의 과정도 꽃이기 때문이다. 제 역할을 다하고 퇴장하는 배우처럼, 지는 꽃은 다음 꽃에게 미련 없이 갈채의 자리를 내어준다.

'영원회귀'를 체득한 꽃은 피고 짐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익소라

강렬한 색에 끌려 동네 시장 가판에서 데려온 익소라.

일주일 내내 재롱 잔치하듯 새 꽃을 피우더니 어느새 한 잎 두 잎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뿔싸 화무십일홍이라 했건만.. 밀린 숙제 하듯 그리고 나니 영정그림이 되었다.















접시꽃

고개를 쑤욱 내밀고 있는 키다리 접시꽃은 이정표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멀리서 보이는 접시꽃은 마중 나온 누이의 함박웃음으로 지친 발걸음을 위로한다.

6월이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여름을 알리고, 어느 날 서늘해진 바람을 느낄 때, 슬그머니 사라져 마음 한편 서운함을 남기는 여름의 전령사.

담벼락, 대문 앞, 동네 어귀, 길 모퉁이, 불쑥불쑥 길을 막는 개구쟁이 같은 접시꽃은 그 커다란 시원함으로 한여름 무더위를 잠시 잊게 한다.

접시꽃에는 여러 형태의 꽃가족이 산다.

올망졸망 꽃을 품은 망울들, 꽃받침, 어린잎, 그 무게를 지탱하는 여린 가지들, 뿌리를 감싸듯 땅을 뒤덮은 풍성한 잎사귀들, 그 모두를 받쳐주는 굳건한 줄기. 아래로 아래로 뻗어가는 뿌리.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다.

잎도, 줄기도, 뿌리도, 모두가 꽃이다.







화분의 기분? 나의 기분!

집일까? 감옥일까? '아름다운 감옥'?

세상 구경도 하고 구경거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배우도 되고 관객도 되고.

조망과 은신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20센티 폭 창틀 정원.

꽃은 자리를 탓하지 않는다.

놓인 곳이 꽃밭이고 꽃대궐이다.

손바닥만 한 정원이 아쉬운 도심의 오래된 주택.

담장 위, 장독대, 화분이 있는 곳이 곧 정원이다.

여름의 왕성한 에너지를 오롯이 받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까지 받는 꽃들은 신이 난 듯.

쑤욱쑤욱 자라서 초록 울타리를 만든다.

엉겅퀴 자주 루드베키아

홍제천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천변은 누가 심지 않아도 때맞춰 피고 지는 꽃들의 무대다.

4월의 꽃이 자취를 감추면 5월의 꽃이 등장하고, 이제 커튼 뒤로 6월의 꽃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5월, 주인공인 장미, 붓꽃, 찔레꽃이 맘껏 자태를 뽐내고, 그 틈새로 이름 모를 풀꽃들이 자란다. 자세히, 오래 봐야 예쁜 풀꽃. 그 자그마한 꽃을 피우기 위해 수액을 끌어올리는 물길이 보일 듯 투명한 가늘고 긴 줄기. 그 줄기 속으로 꽃 빛이 흐른다.

말간 줄기 끝에는 하얀 꽃이, 연자주빛줄기에서는 분홍, 자주가 어우러진 꽃이 핀다.

풀꽃.. 풀의 완성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