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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Feb 26. 2023

‘고향을 여행하다.’ 시즌2,‘부산을 여행하다.’

주기적으로 여행 몸살을 앓는다.

흔히 생각하는 여행 몸살이란 여행을 마친 후 몸과 마음에 남는 후유증이지만 내경우는 여행을 가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여행 전 증상이다. 처방전은 당연히 여행, 여행을 다녀오면 자연스레 낫는 병이다. 슬슬 몸살끼를 느낄 때 체류 가능 시간과 계절에 맞춰 후보지 물색이 시작된다. 예전의 여행이 그림의 소재를 찾아 떠나는 스케치 여행이었다면 요즘은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하고, 다니다 그리고 싶은 곳을 만나면 자리를 펴는 여행 스케치, 일명 ‘가던 길 멈추고’ 버전이다. 스케치와 여행이 키트 속에 들어있는 것은 같지만 주객이 바뀌었다. 주객전도는 오랜 경험이 알려준 일종의 진화, 그로인해 ‘출장’ ‘휴가’가 되었다. 산, 강, 바다, 마을, 어차피 우리나라 도시는 소재의 뷔페, 마음 가는 대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

      


부산으로 여행지를 정한 순간부터 4년 전 브런치에 올렸던 ‘고향을 여행하다’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품이 끝나도 얼마간 작품 속 이미지로 남아있는 배우처럼, 글이 세상밖으로 나가면 그 글로 작가의 이미지는 고착화되고, 언어나 태도, 그 외의 행동에 알게 모르게 구속을 받는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글을 비교 분석할 만큼의 독자층은 없지만 스스로 그 글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그런 경우, 그때 절절한 사모곡 같았던 부산을 글로 그림으로 풀어낸 후 이제 부산은 오래 묵은 오해를 푼 친구 사이처럼 편안하고 만만한 고향이 되었다. 글과 그림으로 풀은 회포, 하지만 아직 풀지 못한 회포가 이번 여행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이번 여행의 정점은 여고 때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까칠했던 나는 학창 시절 친구가 거의 없다. 매년 두어 명 정도 가까이 지내다 학년이 바뀌면 다시 다른 두어 명으로 교체되었고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그나마의 인연도 끊어졌다. 유일하게 중, 고를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낸 친구가 두 명, 그중 한 명은 군인인 남편을 따라 지방을 다니다 연락이 끊겼고 남아있는 유일한 친구가 지금 부산에 있는 친구다.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 때면 내려가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만나러 나가고 결혼 후에도 친정에 갈 때면 엄마에게 애들을 맡기고 친구부터 찾았는데 부모님이 서울로 오시면서 부산은 서서히 잊혀갔다. (‘고향을 여행하다’가 탄생한 이유). 그러기를 삼십 년이 지나고, 사 년 전 떠난 부산 여행에서 친구는 제주여행 중이라 만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미리 전화해서 일정을 잡았다.

부연하자면 친구와 나와 정 반대의 성격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공부만 잘하는 나와 공부만 빼고 다 잘하는 친구, 같이 다니면 친구의 무던함에 나의 까칠함이 묻어버리는.. 친구는 나의 수호신, 해결사였다.

하지만 이십 년 만에 만난 친구는 많이 변해 있었다. 서울을 동경하던 아가씨는 어느새 손녀가 셋인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씩씩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고 자기의 주장을 소리 높여 외치는 연사처럼 온몸으로 내뿜는 고집스러움에 내 말은 계속 묻히곤 했다. 골프, 여행, 명품, 맛집 순례 일주일 내내 꽉 차 있는 모임 스케줄, 무조건 나가고 모이고 수다를 떠는 것이 치매예방의 특효약이라며 혼자 여행하는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나는 책 한 줄도 안 읽는대이’하며 내가 건네준 책을 열어보지도 않는 친구 앞에서 나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은 당황스럽기조차 했다. 친구에게 가장 칭찬받고 싶었는데. 어린 시절 오랜만에 잘 본 시험지를 흔들며 집으로 뛰어갔는데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칭찬받지 못했을 때의 뻘쭘헸던 기분 같은..

지금 생각하니 나에게는 분신 같은 책이지만 나와 반대 성향의 친구에게는 나를 더 낯설게 느끼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차를 가지고 나온 데다 집이 외곽에 있어 퇴근시간의 교통체증을 걱정하는 친구를 서둘러 보내고 호텔에 들어오니 넓은 두 개의 침대가 마음을 흔든다. 같이 잘 수도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오라고 할까. 밤새 옛날얘기를 하다 보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붙잡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와 몇 시간, 하룻밤으로 이십 년간의 간격이 좁혀질까 어쩌면 더 멀어질 수도 있으니 보내길 잘했다는 양가감정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예전에 친구와 거닐던 해운대 밤바다를 거닐었다.

 


생각해 보면 단지 친구만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친구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 나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는 친구사이에 있는, 공평하지만 지극히 개별적인 시간은 우리 둘을 각각의 모습으로 변하게 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서로의 변화를 인정해 주는 것뿐, 옳고 그름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번 여행은 ‘고향’에서 ‘친구’로 대상이 바뀐, 또 다른 사모곡이 되었다.


글과 그림은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소화제, 글은 친구와의 아쉬움을 희석해 줄 것이다. ‘고향을 여행하다’를 쓰면서 부산이 편해졌듯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친구를 그리워하고 친구에게 다가간다. 말로 풀지 못한 회포를 글과 그림으로 풀고 앞날을 예단하는 어리석음은 해운대 밤바다에 던져버리기로.

      


숙소뷰는 진리다.

(졸저 ‘그림을 쓰다’에서 이미 썼지만 더 이상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계속 쓰는 걸로). 바다 쪽을 여행할 때 내가 좋아하는 숙소는 오션뷰 말고 하버뷰. 망망대해는 그릴 것도 마음도 막막하지만 배, 사람, 다리도 있는 항구는 심심하지 않고 다정하다.

숙소를 예약해 놓고 가기 전날밤 체크해 보니 세상에 이런 일이.. 하룻밤에 호텔 두 개가 잡혀있다. 당장 내일은 노숙을 해야 할 상황, 급하게 하버뷰를 취소하고 남아있는 시티뷰로 다시 예약을 했다. 다음날 아무 기대 없이 호텔방에 들어가 습관처럼 커튼을 열었는데 앗! 빌딩사이로 조그만 하버가 보인다. 빌딩을 호위라도 하듯 양옆으로 삐콤 고개를 내민 바다와 커다란 배들이 천연덕스럽게 이웃 행세를 하고 있는, 처음 보는 이상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리다 보면  배와 집은 집을 닮은꼴, 높은 철탑과 깃발의 유무로 배와 집 구별갑판을 마당삼은 바다마을의 이 층집, 어울려 사는 이웃으로 손색이 없다. 된다. 우연치 않은 횡재. ‘숙소뷰는 진리다’는 진리다. 땅땅!!

     

영도 깡깡이 예술마을.

눈앞의 바다는 그야말로 물 반, 배 반. 주차장, 주기장, 그럼 여긴 주선장? 꽉 차있는 배들을 보니 갑자기 ‘선착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깡깡이 마을은 사람보다 배가 더 많은 마을, 유달리 큰 배들은 가까이에서 본 비행기처럼 늠름하고 멋있다. 온 동네가 커다란 조선소와 조그만 선박부품 공업사, 배 수리소, 종류는 다르지만 서울의 문래동 느낌이다. 다른 점은 대형 카페가 없다는 것, (옛날 다방이나 조그만 찻집은 있다.) 덕분에 그림은 못 그리고 마을 산책만. 깡깡이는 배를 수리하는 망치소리라는데 그 뒤에 붙은 예술마을의 의미는 무엇일까? 혹시 또 다른 힙지를 준비 중? 제발 그대로 있어주기를..

    

흰여울문화마을

숙소와 가깝기도 하고 하루가 멀게 바뀌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고향을 여행하다’에 나왔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 흰여울마을을 찾았다.

굽이치는 길 따라 늘어선 집들과 그 아래 펼쳐지는 절벽과 바다가 보이는 카페, 다행히 그림에서 보이는 C기둥 표지판을 단서로 그때의 카페를 찾아다녔다. 분명히 여긴데.. 몇 번을 들락거려도 그 카페는 아니다. 두어 군데 비슷한 카페에 들어가 그림을 보여주며 수소문한 결과 이미 그 카페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친절한 부산사람들 덕분에 비슷한 위치의 카페에서 그 풍경을 다시 그리자니, 이게 뭐라고 감개무량. 옛날이 지금보다 좋은 건 지금보다 한 가지가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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