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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Mar 23. 2023

나의 인문학 교재는 사람. 수다는 오디오북.

         

자타공인 집순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나갈 일이 생긴다. 정확히 말하면 생기기도 하고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어쨌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나가줘야 집에서 나머지 오 일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가끔 세 번, 네 번 나가야 할 때는 등산이라도 한 듯 숨이 차서 그다음 주 나갈 일을 만들지 않는 방법으로 호흡을 조절한다. 이 정도면 오해의 여지없이 심각한 체력 저하, 하지만 이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의 문제다, 사람들과 하루를 어울리면 이틀은 혼자 놀아야 하는, 아마도 희귀병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집에만 있어도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집에서 하는 일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둘 다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니 차별을 두지 않으려 하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친자식과 의붓자식 같은 느낌? 경험은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의붓자식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처럼 일에서도 ‘해야 할 일’이 우선이다. 아들 도시락, 청소, 식사 준비.,  크고 작은 집안일들을 마쳐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야 평화가 오듯 의무를 다해야 자유가 주어진다. 의무수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달콤한 자유 시간, 하지만 봐주는 사람도, 동료도 없이 혼자 하는 작업때때로 지루하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답은 나가는 것, 일주일에 두어 번 외출꺼리를 만드는 이유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도 그리고 전시도 보고 가끔 여행도 하고.. 자유의 에너지는 희생과 봉사라는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가능하게 한다. 관건은 자유의 비중을 점점 높여가는 것..

     

궁여지책 혼자 다니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친구라기보다 요즘 지향하는 넓고 느슨한 관계의 지인정도). 제각각 다른 성격과 성향의 사람들과 만날 때 책에 나오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실물 영접하는 기분이 들고, 그들과의 이야기는 마치 오디오북을 읽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집중을 요하는 일대일 만남보다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고 슬쩍 빠져 관찰자가 될 수도 있는, 상대적으로 긴장감 덜한 ‘모임’을 선호한다. 하지만 혈기왕성하던 시절, 수없이 손절하고 손절당한 이력으로 황량해진 주변,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모임이건 개인이건, ‘부르면 자다가도 나가야 한다’가 명언으로 등극한 지 오래다.


사실 만남이 항상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해 봤을 ‘괜히 나갔어’하는 후회와 함께 피로감을 느끼는 만남도 있다. 그럼에도 나가는 것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 내 느낌만으로는 알 수 없는 세상만사, 나는 이런데 너는 어때?  나와 같은 생각일 때 덩달아 목소리 톤이 올라가지만 다를 때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경청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니까. 다양성은 그림이나 글에서 놓칠 수는 없는 약방의 감초 같은 소재,

이런저런 변명에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만남, 쉽게 지치지 않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빈도수를 조절하는 것은 나만의 노하우다. 독이 비면 채우고, 차면 비워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채우고 비우는 것이 버거워지면 독의 크기를 조금 줄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비법은 마음속에 여러 개의 서랍을 만드는 것, 아바타가 아닌 이상,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으니 전시, 그림, 수다, 여행, 저마다 특화된 분야의 사람들을 칸칸이 서랍 속에 분류하는 것이다. 쓰다 보니 이거야말로 욕심의 결정판이다. 복잡다단한 인간관계를 산업혁명기 분업화처럼 나누는 것은 삭막한 발상 (요즘 너무 SF소설을 많이 읽었나?) 게다가 내겐 그만한 인적 자원도 없으니 언감생심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쌀과 뉘는 나뉜다. 쌀과 뉘는 쓰임새가 다를 뿐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쌀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간다면 슬슬 곳간이 차지 않을까. 그래 서랍은 삭막하니 곳간으로 바꾸자. 곳간은 채움과 비움 가능 한 곳, 교양과목(곳간)을 이수해야 전공(서랍)을 공부한다.

어렵고 오묘한 사람이라는 교재, 독해력을 기르는 방법은 '만남'과 '수다'다. 안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밖에서 현장실습, 일주일에 두어번 나갈 일을 만드는 이유다. '사람'은 인문학 공부의 시작점이자 완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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