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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Oct 10. 2023

슬기로운 추석연휴 보내기.

    

‘추석 졸업했어요’ 이맘때 추석얘기가 나오면 내가 하는 말이다.

그전부터 여러 사정으로 큰집과 왕래가 뜸했던 남편은 시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아예 발길을 끊었으니 나의 추석이라는 공동체적 정체성은 끝나고 연휴라는 개별적 의미로만 남았다.

성묘를 다녀오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무를 한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왔다 갔다 하는 개별적 행사일 뿐이다.

25년 정도의 며느리시절(?)을 보내고 어언 졸업 15년 차, 지나고 보니 눈 깜짝할 새인데 그땐 왜 그리 길고 힘들게 느껴졌는지. 시댁의 대소사를 단지 의무감으로 치르다 보니 재미나 즐거움은커녕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피해의식 마저 들었다.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시간과 그 시간 속 사람들은 사라지고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는 회한만이 남았다.  이왕 할 거 즐거운 마음으로 할걸. 후회는 항상 때늦은 것이 되고 후회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학창시절도 아닌 며느리 시절을 그리워할 줄 누가 알았으랴.

      

여름의 화마가 지나갈 즈음 떠오른 화두는 ‘6일 동안 뭐 하지?’

추석을 졸업한 내게 기나긴 겨울밤같은 육일 동안의 연휴, 게다가  재택근무에서 현장근무를 해야하니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남편의 내조가 절실한 시점, 다행히 남편도 육일 간의 집콕은 지루하다며 어디든 ‘무조건’ 가자고 한다. 사실 무조건이란 말에 살짝 불안하기도 했지만 (세상에 무조건이 어디 있다고.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시작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로 정신없이 바쁜 남편을 닦달할 수도 없어 느긋한 척 기다리다 있다가 결국 검색창에 ‘마지막 남은 객실’이 뜨면서 부랴부랴 숙소를 예약했다.

 남편의 일과 아들의 시험 뒷바라지로 멀리 떠날 수는 없지만 그런 이유로 또 잠시의 일탈이 필요한 이상한 연결고리의 승자는 당연(?) 여행, 삼일간 여행, 가족 식사 하루, 동생들과 식사 하루, 하루 휴식, 그럭저럭 육일 간의 플랜이 짜였다.

그다음 문제는 ‘어디 가지?’. 사실 장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은 게 팬데믹기간 여기저기 국내를 다닌 탓에 딱히 새로운 장소를 찾기보다 전에 갔던 곳 중에서 좋았던 곳을 다시 가면 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산과 절, 내가 좋아하는 마을은 우리나라 어디에나 있으니 삼일이라는 기간만 고려해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내의 도시로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내게 있어 여행은 '도피'의 개념,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니까.

     

 

내 머릿속에 저장된 안동은 하회마을이다. 이십여 년 전 야수회(한국야외수채화가회)에서 사생 갔던 곳, 너무 오래되어 일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마을 내 숙소를 잡은 덕분에 아침 일찍 화우들과 서리를 밟으며 마을을 돌던 기억은 선명하다. 정작 마을에서 그림을 그린 기억은 없고 여고생처럼 몰려다니며 사진을 찍고 바닥에 떨어진 모과를 주우며 신기해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 마을은 추석특수 중이다. 고즈넉한 풍경은 넘치는 인파 속에 묻히고 눈에 띄게 많아진 외국인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텐션과 목소리로 마을은 잔칫집 분위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추석,  잔칫날 맞네. 외국인 친척이 많나고 생각하기로) 그때 보지 못했던 보라색 개미취와 하얀 목화꽃, 마을을 끼고 흐르는 야트막한 낙동강변을 걸으며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밖에.

옛날이 지금보다 좋은 건 한 가지가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정선은 여러 번 가서 새삼스러울 것 없는 곳이다. 가장 최근은 팬데믹이 한창이던 이 년 전, 예전에 갔던 철암 탄광촌을 찾아갔는데 그 주소에 신축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었고, 광부들이 거주했던 천변의 까치발 건물들은 유적지인양 조금만 넘겨두고 모두 철거되어 있었다. 고한의 오래된 집들 또한 카페와 숙소 골목으로 예쁘게 리모델링되어 생경스럽기만 했는데 코로나시국으로 삼탄아트마인마저 휴장, 툴툴대며 발길을 돌렸다.

그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고한읍에 숙소를 잡고 아침 산책 중 잠시 둘러본 ‘고한 18번지’는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나름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다시 찾은 철암의 언덕 위 옛 광부들의 집과 거리 또한 깨끗하게 정비되어 예전의 자연 그대로의 탄광촌 분위기는 산뜻한 관광지 이미지로 변해 있었다. 삼탄아트마인을 둘러보고, 천변 언덕 위에서 그림 한 장 그리니 나니 희뿌연 안개가 걷히듯 남아있던 태백의 미련이 사라진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개별적 기준, 나의 아쉬움은 답이 되지 못한다. 양보와 타협, 정도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다.

어차피 시간의 양탄자는 사람과 풍경을 같이 태우고 가는 것. 편승이 정답이다.

     


'여기 생각나?' '여기 맞다.' '이쪽에 ㅇㅇ있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옛날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하고 그때는 보지 못한 풍경들이 새롭게 들어온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이 교차하는.. 은 책이나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는 것과 같은 이유다.

여행의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도피’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이유들은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내년 추석연휴는 어떻게 보내게 될까.. 성급한 궁금증은 올 추석의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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