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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y 24. 2022

암 수술을 받다.

암환자가 되기까지 2

기침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여름방학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전원한 병원에서는 폐렴이 아니면 결핵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방학 전 일주일 가장 바쁜 기간에 병가를 냈다. 격리를 해야 했기에 2년 간 노환으로 요양병원에서 누워만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호흡기내과를 통해 결핵 검사를 포함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였지만 폐렴도 결핵도 아니었다. 결국 병명은 알아내지 못한 채로 나는 흉부외과로 트랜스 되었다. 보통의 경우 흉부 CT를 통해 폐암을 진단받고 이후 기관지 내시경 검사 등을 통해 조직검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나는 흉부 CT 검사를 통해서 폐에 구멍이 있다는 것 외에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흉부외과 교수님은 호흡을 할 때 먼지 등이 폐의 구멍으로 흡입되어 기침이 유발될 수 있으므로 폐의 구멍 난 부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전 병원에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어떻게 '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교수님은 자신 있는 말투로 많은 임상의 결과 그러한 경우가 종종 봐왔다(그래서 큰 병원엘 가야 하는구나. 동생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며 PET-CT 촬영을 권했다. 당시 대략 50만 원가량의 비용이 드는 검사였는데 검사의 목적은 암 전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암'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혼미해져 일단 그러겠노라 하고 돌아왔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젊은 여성에게 쉽게 오는 병은 아니라고, 증상도 없었다고,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검사와 진료를 예약하고 김천 부모님 댁에 다녀왔다. 아직 아무것도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어서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 묵직한 비밀 꾸러미를 묶어두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고 떠들며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 경부고속도로를 지나오는데 터널이 너무나 길었다. 거대한 구렁이의 입 속으로 끝도 없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터널이 아니라 동굴 속으로 어둠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지선’ 씨가 그랬다. 인생은 동굴 같은 것이 아니라 터널 같아서 고난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고.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다 지나간다.'가 나의 좌우명이다. 내가 아는 어느 신께 '당장 나를 살려달라.' 빌어도 결국 내 몫으로 견뎌내야만, 지나가야만 끝이 난다. 터널을 지나고 나면 새로운 빛이 시작된다는 것을 믿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그 긴 터널처럼 답답한 마음과 막막한 상황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았다.

펫시티 결과 두어 군데 이상이 보이지만 전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교수님의 소견에 따라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암인지는 모르겠지만 폐에 있는 구멍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단 수술을 하자고, 수술을 한 후 조직검사를 하면 암인지 여부는 알 수 있을 거라 했다.   


나는 8월 22일, 개학날 수술했다. 입원이 필요 없는 작은 수술은 두어 번 했으나 이렇게 큰 수술은 처음이었다. 교수님께 간절히 부탁드렸다. 나이 많은 엄마가 또다시 자식을 앞세우게 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임신 5개월의 마음 약한 동생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만약 암이라면 내게만 말씀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폐는 우측 3개, 좌측 2개의 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폐기능이나 크기, 위치 등을 고려하여 쐐기절제술, 폐엽절제술, 전폐절제술 등을 시행한다. 내가 받은 수술은 흉강경으로 우측 하엽을 절제하는 폐엽절제술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교수님 말에 따르면 간단한 수술이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암이래.'

나의 신신당부는 잘려나간 폐 조각과 함께 버려졌다. 교수님은 수술 중간에 엄마와 동생에게 나의 '암'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거나, 믿고 싶지 않았거나,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했다. 어쩌면 대담하거나 담담한 것이 아니라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암에 걸린 환자의 심리 변화 1단계는 '부정'이다.


교수님을 원망할 새도 없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수술을 한 자리는 흉관과 마약성 진통제가 꽂혀 있어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원래 목과 어깨가 안 좋았던 나는 3시간이나 팔을 든 채로 수술장에 누워있어서인지 엄청난 근육통에 시달렸다. 너무 아파서 똑바로 누워 잘 수 없어서 잠도 앉은 채로 잤다. 수술 후유증인지 항생제와 진통제 후유증으로 먹지도 못했고, 먹은 것도 없이 토했다. 소변도 혼자 볼 수 없어서 엄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수술 후 통증이나 후유증, 회복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행히 나는 수술과 직접 관련이 있는 통증은 없었다. 수술한 부위도 아프지 않았고 흉관과 마약성 진통제를 제거할 때도 아프지 않았다.

수술 후 기침은 더욱 심해졌지만 수술 자국이 아물어 가는 시간 동안 서서히 사라졌다.   


암환자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건데 우리나라에는 중증환자 산정특례 제도라는 것이 있다. 암이나 그 외 중증 질병인 환자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거나 진료를 받을 때 진료비의 5%만 부담하는 것이다. 중증환자 등록 후 5년 동안 적용되고 5년 후 완치 판정을 받으면 중증환자 등록에서 제외된다. (나는 작년에 재등록 당했다.) 새삼 한국에 태어난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지금의 나는 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6년이나 되다 보니 때론 환자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불안을 24시간, 365일 틈 없이 인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기에 망각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순간순간 불안하다. 기침만 해도, 호흡만 힘들어도, 식욕만 떨어져도 혹시? 하게 되는 것이 또 암환자의 숙명인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폐암은 소세포성 폐암과 비소세포성 폐암이 있는데 나는 비소세포성 폐암 중 선암(adenocarcinoma) 판정을 받았다. 조직 검사지와 의무기록지를 떼어 보면 이러한 내용들이 자세히 나와있기 때문에 교수님께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을 때나 질문을 미처 못했을 때 유용하다. 비소세포폐암에는 선암, 편평상피세포암이나 대세포암 등이 있다. 과거에는 소세포폐암 환자가 많았으나 요즘은 전체 폐암 환자의 20% 정도를 차지하며 소세포폐암은 대개 수술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80%는 비소세포폐암 환자이다. 잠시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 비흡연자였다. 건강이라면 자신 있었던 한 여성 환자는 암 판정을 받기 직전까지 요가와 필라테스 강사를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병에 언제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프고 나서도 독한 치료를 잘 버텨내려면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할 때 체력을 길러놓아야 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쉬는 동안에도 아이들과 학부모님의 상담 전화는 계속 걸려왔다. 바뀐 담임선생님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 반 아이들이 나 역시 너무나 그리웠다. 교사 생활 동안 처음으로 병가 한 달을 내고 나는 곧 우리 반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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