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우리 언제 보고 지금 만나는 거지? 알고보면 진짜 오래되었어!"
초등학교부터 봐왔던 오랜 친구를 삼청동에서 만났다. 지난주에 만난 것만 같은데 계산해보니 수개월이 흘렀다. 익숙하고 편한 느낌은 오랜 친구가 최고이다.
"한벽원미술관은 좀 걸어올라가야해. 빗소리 좋으니 걸어가자!"
"좋아!"
성향은 다른데 늘 뜻이 잘 맞는 친구. 그래서 오래 지내왔나보다.
사실 오늘 친구를 만나기 전 조금 떨림이 있었다.
2주 후 친구는 위에 있는 악성종양들을 제거하기 위한 큰 수술이 예정되어 있고, 그 전 멀쩡(?)할때 보자는 말로 만나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말을 어떻게 친구와 나눌까, 또 어디서 만나서 무엇을 해야할지 감이 안잡혔었다.
그러다 신박사TV 유튜브를 통해 구광모 화가님의 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작가님이 암을 이미 견뎌낸 적이 있으며,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재발된 암을 또다시 이겨내는 중이라는 글을 보았다. 그리고 추상화.. 아무런 설명도 형체도 드러난 것이 없지만 그 안에 있는 색과 붓이 지나간 흔적만으로 보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추상화가 마음에 확 꽂혔다.
나는 단박에 오늘 만나는 친구에게 이 전시를 캡쳐하여 보냈고 그래서 삼청동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긴 길을 따라오는 빗물을 자박자박 밟으며 한벽원 미술관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도 없이 고요함이 찬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내 친구의 몇배쯤 되는 큰 그림들이 각자의 얼굴로 내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서 그림과 그림 사이를 오가는 작은 내 친구를 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무도 없어서 좋다. 그리고 그림에서 힘이 느껴져."
구광모 화가님의 바램, 그림의 에너지, 삼청동의 기운, 내 마음 모두 짬뽕하여 친구의 악성종양을 퇴치할 수 있을거라 기도했다.
"이 글 되게 좋다! Love the life you live, Live the life you love..!"
자기애가 풍부한 나와 친구는 이 글귀에서 또 감동을 받는다.
내 이름과 친구 이름을 방명록에 쓰고 찰칵 사진을 남긴 후 우리는 삼청동의 그리운 맛집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부분 가게들이 비워져 있고, 문을 닫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늘 먹을 것, 볼 것, 마실 것, 즐길 것이 넘친다고 생각했던 삼청동이 이렇게 휑하게 비어 있다니..! 연신 말도안되를 외치며 걷고 또 걸었다.
"40년된 집이래. 여긴 열려있다."
홍합정식이 유명하다는 오래된 밥집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청결하고 정갈해보이는 내부와 직원분이 보였고, 음식들도 정말 맛이 좋았다. 발길이 뚝 끊길 수 밖에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는 건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매력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맛있고 깔끔하고 건강해지는 것 같아. 밥이 정말 고소하다."
친구는 눈에 띄게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것이 보였다. 자극적인 젓갈류는 피하고 시원한 들깨국물과 야채를 느리게 음미하며 먹는 듯 했다. 고기 좋아하던 내 친구가..
친구의 위암은 다행히 수술이 잘 되면 일상으로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는 적기에 발견했다고 한다. 수술 결과에 따라 다르겠지만 항암치료도 필요없다고 한다. 얼마나 다행인지..!!
의사선생님도 좋은 분을 만나 심리적으로 안심이 많이 되는 말을 해주셔서, 울면서 갔던 친구와 친구의 남편은 큰 짐을 덜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부부에는 패닉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치료방법과 이후 과정들을 미리 들은 후 일상에 대한 감사함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더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매일 울었어. 그런데 지금은 한결 홀가분하고, 편해. 이번 기회로 다른 일도 찾아보고, 좀 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 남편이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전염병의 여파로 듬성듬성 빠진 이처럼 임대문의가 붙여진 빈 건물 사이에서, 홀로 밝은 등을 밝히며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밥집이 있는 것처럼,
큰 질병의 타격을 정면으로 맞은 내 친구는 그만의 변치않는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는 친구의 밝은 미소를 보며, 오늘 삼청동에 발을 디디며 먼저 느꼈던 떨림이 싹 가시면서 벌써 친구가 암 완치판정을 받은 것 처럼 보였다.
수술 잘 받아, 잘 될거야, 넌 이겨낼 수 있어 등등 이런 말들을 일체 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쏴아아 내리는 빗속 루프탑에서 단 둘이 튀기는 물방울을 맞아가며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모든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장마 속 삼청동 산책을 마치고 내려가며 나는 이 정겨운 곳과 친구에게서 힘을 얻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번 두번 닦으면 닦을 수록 반짝이는, 단단하고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했다.
다시 살기위해 모이는 삼청동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내 친구도, 더불어 나도 동시에 터닝포인트를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헤어지면서 친구는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갈께 또 봐!"
삼청동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