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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쑤 Aug 04. 2024

화를 품고 있는 나

‘아, 드디어 오늘 하루도 끝났구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포근한 이불에 몸을 눕히는 순간만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그때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감이 몰려온다. 그날도 평범한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일찌감치 씻고 몸이 자석에 끌리듯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자리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는 순간 낮에 들었던 문장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낮에 직장 상사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한 제안에 형평성이 어긋나는 것 같다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낮에 그 얘기를 들었던 상황에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뒤 하루 종일 그 일은 잊고 있었다. 근데 뜬금없이 거짓말처럼 그 말이 선명하게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형평성? 형평성이라고? 참내, 형평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침대에 누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물밀듯이 올라왔다. 잠을 자기는커녕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지난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침이 됐다. 8시간을 잔 사람치고는 몸이 무거웠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밤새도록 나의 잠을 설치게 했던 ‘형평성’이라는 말은 사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가벼운 미팅을 하는 와중에 나온 얘기였고 상사의 말투도 점잖았다. 심지어 조심스레 의견을 건네는 그의 태도에서 나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갑자기 화가 솟구쳤던 이유는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 때문이었다. 


타 부서에서 새로운 직원이 팀장으로 승진했다. 상사는 새로운 팀장을 많이 배려했다. 방 크기부터 책상 크기까지 그 어떤 것도 나보다 부족하면 안 되었다. 심지어 9년 차 팀장인 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되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사사건건 예민하게 내뱉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의 서운함은 쌓여갔다. 


서운함이 쌓여가는 동안 나는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럴 수 있다며, 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나한테 미안해서 괜히 더 예민하게 얘기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직급에 대해 논의하는 와중에 상사는 새로운 팀장과 직급을 달리 가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리 같은 팀장이라지만, 나는 9년 차인 나와 이제 막 팀장이 된 그의 직급이 다른 게 어떻게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건지 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었다. 그게 그 ‘형평성’이라는 말에 그동안 조금씩 쌓여왔던 화가 한 번에 폭발했던 이유였다. 



처음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에게 이런 날들은 반복이었다. 물론 새내기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에너지가 많이 분산됐다. 그렇기에 사사건건 화가 나지도, 화를 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내 안에 머물며 나를 분노하게 하는 말들은 여전히 내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 


결혼하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을 만나면 약속이나 한 듯 서로 그날 있었던 화나는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누가 누가 더 열받나 내기라도 하듯이 각자의 사연을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사 때문에, 동료 때문에, 부하직원 때문에, 심지어 배송 기사님 때문에 열받는 사연들은 다양했다.


결혼하고 난 후에는 하소연의 대상이 신랑으로 바뀌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신랑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있었던 화나는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저녁을 먹고 산책하면서, 자려고 눕는 순간까지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심지어 그 당시에는 일이 많아서 야근하는 날도 많았다. 야근하고 늦게 들어온 날도 그나마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긁어모아 화를 내는데 소진했다.



친구들이나 신랑은 내 얘기를 잘 들어주었다. 근데 문제는 이들은 나의 감정을 100%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공감받으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남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 나에겐 왜 화가 나는지.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 한참을 설명하다 보면 질문이 쏟아진다.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면 공감은커녕 내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와 신랑에게 답답함이 느껴진다. 


나는 내 얘기에 공감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공감을 하려면 우선 내가 화나는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대화가 끝나는 날이 많았다. 나는 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돈과 시간을 써가며 공감을 얻기 위한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어렵게 약속을 잡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오늘은 나의 이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을까. 식사 시간 동안 나는 갈증 나는 목을 맥주로 적셔가며 열변을 토한다. 그 인간은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우습게 보이나. 나는 정답 없는 질문들을 허공에 던지듯이 씩씩거리며 떠들어댄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은 나의 얘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얘기에 공감을 해주니 신이 나서 더 떠들어 댔다. 한잔, 두 잔,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나누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며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조만간 다시 만나자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맥주 몇 잔에 기분이 알딸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피곤하긴 했지만, 스트레스가 확 풀린 기분이 들었다. 약간의 신나는 기분을 안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근데 신나는 기분도 잠시, 공허함이 몰려왔다. 분명 내 얘기를 공감받으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는데 왜 공허함이 몰려오는 걸까? 누구를 만나도, 아무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헤어지고 나면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려 해 보니 몸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간신히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나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나는 화가 났고, 그 화를 주체할 수 없었고,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해야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상들이 내 소중한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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