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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쑤 Aug 11. 2024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되는 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른들이 말하는 화병이 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분들은 그냥 항상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이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난다. 씩씩거리며 부엌으로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자려고 누운 그 순간에는 아무 일도 없는데 왜 갑자기 화가 났을까. 어떤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인 것 같은데 얼굴이 벌게지면서 잡아먹을 듯이 흥분하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화가 난다는 것. 화를 낸다는 것.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내면 되는데 왜 참고 있는 걸까. 그러면서 화병 때문에 못 산다는 둥 더 화를 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화병’을 검색해 봤다.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간의 생리 기능에 장애가 와서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 한의학적으로 풀이한 뜻이었다. 즉, 화병이 나지 않으려면 억울한 마음을 제때 삭여줘야 한다. 


근데 문제는 애초에 화가 나는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억울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억울할 일이 없다면 화가 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억울하기 때문에 화가 나고 화가 쌓이면 화병이 걸린다. 화병이 걸리면 간의 생리 기능에 장애가 온다.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다. 가슴이 답답해서 잠도 잘 자지 못한다. 이게 ‘화’와 ‘화병’의 연관관계이다. 




사회생활을 해보니 왜 화병이 생기는지 이해하게 됐다. 억울한 마음에 화가 나는데 이 화는 풀지 못하고 계속 쌓이기만 한다. 회사만 아니었다면 소리라도 한번 빽 질렀을 텐데. 상사만 아니었으면 가만히 듣고만 있진 않았을 텐데. 부하직원만 아니었다면 저 버르장머리를 당장 고쳐줄 텐데…. 소리도 못 지르고,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버르장머리도 못 고치니 억울하다. 억울한 마음에 매일 화가 쌓인다. 


우리나라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의미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것이다. 즉, 오는 말이 곱지 않으면 가는 말이 곱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 유독 화가 쌓이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에게 오는 말은 곱지 않은데 나로부터 가는 말은 고와야 한다는 것. 똑같이 되돌려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억울함이 나에게는 가장 큰 화의 원인이었다. 


말을 돌려주지 못하면 던져버리든지 잊어버리든지 어떤 식으로든 내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 안에 끌어안고 있었다. 불구덩이처럼 뜨거웠다. 잊히는 것보다 더 많은 새로운 말들이 내 안에 들어왔다. 돌려주지 못하는 말이 많아질수록 내 안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는 점점 쌓여만 갔다.




“너는 인마 솔직히 동안은 아니야.” 퇴근 후 직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남자들끼리는 이런 농담도 스스럼없이 내뱉는 건가. 친구끼리면 몰라도 이미 위, 아래가 정해져 있는 관계였다. 말을 한 사람은 당연히 윗사람이었다. 나는 순간 그 얘기를 들은 직원을 쳐다봤다. 나에게 한 말도 아닌데 감정이입이 되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가요?” 정작 그 얘기를 들은 직원은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 며칠 동안 그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며칠 후에 조심스레 그 말을 들은 직원에게 물어봤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화나지 않았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솔직히 너무 궁금했다. 근데 정작 그 직원은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상황 설명을 해가며 다시 기억해 내도록 도왔다. “아 그거요? 그냥 듣고 마는 거죠 뭐.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열받아서 못살아요.” 그 직원은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의 문제는 이거였다. 내가 들은 말도 흘려보내지 못할망정 남이 들은 말까지 끌어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말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배울 수 있다면 나도 배우고 싶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침착하게 받아넘기는 그 직원의 여유 있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사소한 말조차 가슴에 크게 담아 두었다. 내가 당한 만큼 되갚아 주지 못하는 것이 유독 억울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했다. 오로지 되갚아 주지 못하는 것에만 집중했을 때는 내가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가슴에 담아둔 채 고통스럽다고만 느꼈다. 내 안에 쌓여가는 화를 적절하게 분출하지 못해 시도 때도 없이 화가 튀어나왔다. 


사소한 것에도 과하게 화를 냈고, 부정적인 생각에 집중하며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부터 바꿔야 했다. 


정작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신랑이 자주 나에게 물었다. 혹시 본인이 뭘 잘못한 게 있냐고. 신랑의 그 질문은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에게는 계기가 필요했다. 더 이상 상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의 에너지를 낭비할 수 없었다. 


변화는 내가 화나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나만의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었다. 조금씩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내 안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우고 상대의 말을 흘려들어야 했다. 그것이 내 삶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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