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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쑤 Aug 11. 2024

내가 이긴 줄 알았다


“이번 달까지만 근무하고 그만두겠습니다.”


“………………….”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를 받고 당황해서 얼굴이 벌게진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사장을 뒤로한 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방문을 닫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다닐 곳이 없는 줄 알아. 어디 잘 먹고 잘살아봐라.’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장과 일하다가는 내가 정말 화병으로 제명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밤마다 씩씩거리느라 하루도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에 야근에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 이러다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둔다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작부터 이직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긴 했다. 몇 곳의 회사에 인터뷰를 봤지만, 적당한 회사를 찾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난다고 회사를 그만둘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했다. 내가 조만간 멋지게 사직서를 낼 거라고.


나의 계획 이랬다. 내가 원하는 회사를 만난다. 모든 조건을 만족스럽게 협상하고 고용계약을 끝낸다. 때마침 사장이 내 속을 뒤집는다. 나는 멋지게 사직서를 제출한다. 사장은 당황하고 나를 잡아보지만 나는 이미 이직할 회사가 정해져 있다.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는 자의 여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시지 그러셨어요.’라는 말도 하면 좋을 것 같다. 


때마침 원하는 회사가 나타났고 1차 인터뷰를 본 상황이었다. 헤드헌터가 결과는 2주 정도 후에 나올 거라고 했다. 이제 곧 내가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설레었다.




그러던 중 연초에 의례 하는 연봉 협상 날이 다가왔다. 나는 이미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사장이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듣기만 하리라 다짐했다. 어차피 연봉 협상이라는 게 말이 협상이지 회사에서 다 정해서 통보만 하는 거다. 나는 그냥 듣고 종이에 사인만 하면 되었다.


‘똑똑’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장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로 나를 반겼다. 뒤에 있는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순간적으로 사장의 뒤로 후광이 비추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책상엔 출력된 문서가 나란히 2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앉으라며 의자를 가르치는 사장의 기분은 왠지 좋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리는 갑과 을의 자리였다. 그 순간만큼은 사장 자신이 갑의 위치였다. 스스로 그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 순간부터 왠지 모를 짜증이 올라왔다. 그렇지 않아도 비아냥거리며 트집을 잡아 말하는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가치를 깎아내리는데 선수였다. 나는 그런 사람과 갑과 을의 관계로 마주 앉아 있었다. 


사장은 작정한 듯이 여유 있는 말투로 나에게 질문했다. “김 대리, 혹시 베트남 출장 가고 싶지 않아?”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 시기에 회사는 베트남 공장 설립 기념으로 관계자들의 집단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막 영업부에서 부서를 옮긴 상황이었다. 관계자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명분이 전혀 없진 않았다. 사장은 본인이 결정권자라는 것을 내심 강조했다. ‘그렇다고 보내주지도 않을 거면서.’라고 생각하며 나는 끝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한테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사장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더니 비꼬는 말투로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김 대리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경향이 있어.”, “영업부에 후임으로 온 사람 책임지고 김 대리랑 똑같이 만들어 놓아요.” 은근히 내가 영업부로 다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약점으로 잡고 협박하듯이 말했다.


그 자리에서 너무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대꾸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오로지 사장에게 이 화를 갚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미팅이 끝났다. 




사장실에서 자리로 돌아온 순간부터 나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끌어안고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정수리에서 연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충분히 받아칠 수 있는 말을 하지 못한 게 억울했다. 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뜨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았다. 아직 인터뷰를 본 회사에서 1차 인터뷰에 대한 결과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뒀다가 취업이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나는 사장에게 내가 당신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는 게 우선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사직서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을 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사직서를 받고 당황해할 사장의 표정을 상상하며 웃음이 났다. 아침에 오는 게 기다려졌다. 나는 일찌감치 출근했고 9시 정각에 사직서를 냈다.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던 기쁨은 잠시였다. 사직서를 받는 순간 사장은 잠시 당황했다. 오전엔 사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내 후임은 나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인수인계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작 나는 잠깐의 기쁨을 누린 후 한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1차 인터뷰 결과를 통보받는 2주 동안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퇴사하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2차 인터뷰 일정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결국 회사를 퇴사하는 날 나는 갈 곳이 없는 백수가 되었다. 


화는 그 어떤 감정보다 피해가 크다. 나는 내 화를 표현하기 위해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며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상대방도 고통을 당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나의 퇴사가 상대방에게 고통이 될 정도의 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화를 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던지기 위해 빨갛게 달궈진 석탄을 움켜쥐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사장에게 내 화를 표현하는 것만 생각했다.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정작 달궈진 석탄에 손을 덴 사람은 나였다. 사직서를 내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건 틀린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그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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