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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biana Aug 06. 2020

14년의 비행을 끝으로 육아 휴직을 시작하다

육아휴직


스케줄을 한번 받으면 눈 깜짝할 새 한 달이 지나고 그렇게 12번의 스케줄을 받으면 1년이 지난다. 시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똑같이 주어졌지만 체감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비행기에서 일을 하는 이 시간은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쥬만지에서 주인공이 게임기를 켜고 게임 속 세상으로 빠져들어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처럼  항공기 엔진이 켜지는 순간 내 세상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새로운 세상으로 전환된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의 그 모든 시간은 내 현생에서 제외된다. 그러니 3박 4일의 장거리를 한번 다녀오면 승무원의 현생 체감 시간은 4일이 아닌 2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일이 아닌 여행으로 비행기를 탈 때면 비행기로 이동하는 모든 시간이 여행의 순간이고 여전히 현생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생이 되기도 하고 현실과 차단된 다른 세상이 되기도 한다.  항공기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승무원들은 항상 이렇게 시간의 경계를 넘나더니 현생 체감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한 달에 두세 번의 장거리 비행을 다녀오면 한 달의 반이 훅 지나가버리고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또 그렇게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 그래서 승무원의 시간은 마하의 속도로 지나간다 했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나이에 입사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비행을 하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을 훌쩍 넘긴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무렵 일찍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이미 복직한 동기들도 있었고 육아 휴직으로 쉬고 있는 동기들도 꽤나 많았다. 쉬지 않고 일한 지 13년쯤 되니 쉬고 있는 동기들이 이따금 부러웠다. 사실 육아라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로지 일만 하며 달려온 승무원에게는 그 조차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승무원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다른 직종들과는 달리 임신하는 순간 비행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임신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휴직에 들어간다. 임신하고 거의 막달까지 일을 하기도 하는 다른 직종들에 비하면 승무원의 '산전휴가' 란 분명히 탐나는 휴가임에 틀림없었다. 그 당시 나는 부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이코노미 전반을 관리해야 하는 부팀장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보통 브리핑은 비행 1시간 50분 전에 실시했는데 부팀장이라면 통상 브리핑 2시간 전에는 회사에 와서 비행 준비를 마치고 팀원들을 맞이하는 분위기였다. special pax의 정보와 노선별 주의사항 특이사항들을 정리하고 briefing sheet를 만든다. 흔히들 대한항공에서 롱런하려면 부팀장 직책을 짧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부팀장이라 함은  '고생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니  그런 상황과 나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제쯤 아기가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그때!
이 모든 복합적인 상황을 간파하고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녀석이 찾아와 주었다. 이 녀석 아무래도 효자임이 틀림없었다.  
임신 계획 후 4개월만 아이가 생기고
나는 그렇게 비행한 지 13년 하고 10개월 만에 산전 휴직에 들어갔다.
입사 후 쉬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긴 비행 여정에 쉼표를 찍는 순간.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당황스러웠다. 임신 사실을 확인한 5주 차부터 출산까지 약 8개월, 그리고 출산 후 육아휴직 12개월까지 합치면 최소 20개월간은 하늘에서 내려와 승무원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당장 출산까지 주어진 나만의 자유를 어떻게 알차게 보내야 할까?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임신 사실 확인서를 들고 회사에 가서 휴직 서류에 사인을 했다.
사인을 하고 회사를 나서는 기분이 묘했다. 지금껏 휴직은 팀원들이나 후배, 선배, 동기들의 이야기였는데 나도 '휴직'이라는 것을 하게 되다니 시원섭섭하고 설레고 아쉬운 감정이 물밀듯 몰려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 길로 5년 이상을 육아맘으로만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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