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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행복했던 '가녀장의 시대' 후기

by 행복수집가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출판사 : 이야기장수)


이 책은 22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나는 이제야 읽었다. 당시에도 베스트셀러였지만,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서도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슬아 작가 특유의 문체와 살아있는 글맛 덕분에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한번 펼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들었다. 이런 책을 만났다는 사실이 참 행복했다.


회사 점심시간마다 이 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다음날 점심시간이 간절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이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이런 책을 읽으면 마음이 한결 활기를 띠고, 일상도 좀 더 즐거워진다. 이 책이 내게 딱 그랬다.




이 책의 기본 줄거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출판사 사장인 딸이 부모님을 자신의 출판사에 고용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 가족은 가부장도, 가모장도 아닌 '가녀장'이다. 그런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들이 무척 신선하고 재미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슬아는 할아버지와 삼촌, 며느리들까지 함께 사는 대가족 속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아버지가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슬아는, 어릴 때부터 남자와 여자의 분리된 역할을 자연스레 보고 듣고 배우며 성장했다.


다른 어른들은 이런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어린 슬아는 늘 어딘가 낯설고 이상하게 느꼈다. 그런 슬아가 어른이 되어 작가로 성공하자 대가족 집을 나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을 마련하고 그곳을 출판사로 꾸민다. 그리고 부모님을 출판사 직원으로 고용해 셋이 함께 살아가는데 이 설정만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이 책은 가녀장 가족의 풍경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리면서도, 때로는 코끝을 찡해지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울림을 주기도 했다. 또 어떤 순간에는 한없이 진지해지며 마음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유교 문화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한 선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고, 이를 벗어나면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눈총을 받았다. 사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잘못이 아닌데, 어느새 사회가 만든 분위기와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타고난 성향과 재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남자가 부엌일을 잘할 수도 있고, 여자가 바깥일을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교문화는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부엌일로 고정해 버렸다.


그러니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고 가족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뿌리가 남아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은 페미니즘을 내세우거나 극단적인 내용을 담과 있지 않다. 유교문화에 대해 딱히 비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과 유교적 가족 문화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딸이자 작가인 슬아는 슬아대로, 아빠이자 고용인인 웅이는 웅이대로, 엄마이자 직원인 복희는 복희대로 각자 잘하는 걸 하며, 셋이 조화를 이루어 산다.


이 세 식구의 성격과 특징이 모두 다르지만, 서로 잘하는 것으로 상대의 취약점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의지와 힘이 되어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위나 아래가 따로 없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잘하는 부분으로 협력해 한 가정과 회사를 단단하고 평화롭게 유지해 간다.




이들의 이야기는 매 화마다 유쾌하고 재미있어서 웃다가도 어느 순간 눈물이 나기도 했다. 재밌게 읽다가도 꼭 마지막에는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었고, 그 순간 느낀 감정을 빨리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오래 붙잡아 두고 싶기도 했다.


복희는 다시 태평하게 부엌일을 하러 간다. (중략) 그런 힘을 지니고도 그는 어쩐지 가모장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 가부장이든 가녀장이든 아무나 했으면 좋겠다. 월급만 잘 챙겨준다면 가장이 집안에서 어떤 잘난 척을 하든 상관없다. 남이 훼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복희는 안다.


이 책의 등장인물 모두는 가부장이나 가모장이, 가녀장이 되려고 한 적이 없다. 어쩌다 보니 딸이 유명한 작가가 돼서 돈을 가장 많이 벌게 되었고, 그래서 사장이 되었으며 부모는 딸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각자의 위치가 어떻든 서로를 존중하며 맡은 역할을 다 한다.


이들은 누구에게 속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으로 살면서 그 자체로 온전한 한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누가 누구의 위나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 좋았다. 진정한 가족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의 마지막 장 '작가의 말'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비 부의 자리에 계집녀를 적자 흥미로운 질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질서를 겪어볼 기회를 소설에게 주고 싶었어요.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습니다.


이 글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다 담겨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족제도에 대한 오래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이 내 가족들 도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색을 가진 고유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슬아네 가족들을 보며 웃고 행복해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가족들이 생각났다. 내 곁에서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서로가 서로의 수호신이 되어준 내 가족들이.


나는 내 가족들이 각자의 타고난 성향대로 살아가고,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우며, 소소한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 모습 그대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하는 일상이 계속되면 좋겠다.


이 책을 만나게 돼서 정말 행복했다. 읽는 동안 느낀 울림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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