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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램 Dec 22. 2020

방학은 끝났다

사실 복직은 진작에, 추석이 끝나자마자 했다.


그리 긴 휴식도 아니었나 싶게 회사는 그대로였고,

쭉 앉아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원에서 나에게 구체적인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정한 시간이었다.

작년 초, 처음으로 무너졌을 때, 연차를 긁어모아 한 달을 쉬었고, 나아지지 않은 채 1년을 보냈다.

이번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나에게 3개월을 주었던 거다.

나를 힘들게 하지 않는 공간에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둔 시간의 힘 덕분인지 3개월이 다 채워가던 시기, 더 이상 약을 먹지 않게 되었다.


두렵긴 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회사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부침은 예견된 것이었고, 다만 그 정도가 어떨지 예상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들쑥날쑥한 감정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게워낸 감정들, 숙제들은

잠시 내 눈앞을 떠나 있었을 뿐,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다만  그것들을 직시하기 위해, 힘을 그러모은 시간이었다.




미워하는 사람, 미움받는 순간, 무력한 상황, 피하고 싶은 일들.

변주되었을 뿐, 그대로였다.

새삼스러운 당연한 사실. 회사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적응하거나, 변하거나, 견뎌내거나 혹은 그만하거나. 선택해야 한다.


복직 이후 두 달을 표현하자면

"꾸역꾸역"


꾸역꾸역 출근을 했다.

예전처럼 출근이 하기 싫어 울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나아진 것이랄까.

꾸역꾸역 일도 했다.

미룰지언정, 주어진 일을 피하는 요령은 잘 몰랐다.


퇴근 후에는 일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일도, 사람도. 그로 인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는 게 중요했다.

회사 애플리케이션을 지웠고,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제 잠을 잘 잔다.

눈을 감으면 상념들이 오고 가긴 하지만,

잠 못 들게 할 정도로 괴롭히지 않는다.


며칠 전, 한 가지 깨달음을 곱씹으며 잠들었다.

'나는 나에게 실망하는 법을  몰랐던  같다.'

쓰고 나니 참 오만한 말이구나 싶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걸 계속 피하다가 여기까지 온 걸 알았다.


간절히 원해서 얻었던 자리.

누구보다 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일.

만신창이가 된 채로 내 손으로 포기한 경험.

모든 걸 내가 망쳐버린 게 아닐까 원망만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타인도 원망했고, 상황도 원망했다.

그 중에 나를 탓하는 게 제일 쉽더라.


'조금 더 강했더라면, 조금 더 뻔뻔했더라면, 조금 더 가진 게 많았더라면'

'조금 더, 버텼더라면' 하는 괴로운 가정법.


타인, 외부의 상황은 내가 원망한다고 쉽사리 바뀌는 게 아니니,

내가 바뀌어야 했는데. 하는 자괴감이 맹독같이 나를 파고들었다.

그 독에 내성이 없었나 보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다 나에게 경험이고,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어려움이 나를 어디까지 몰고 가는지 깨닫기 전에 문제는 해결되었고, 가끔은 이전보다 상황이 더 나아지기도 했다.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서 몰랐다. 힘든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털어내야 하는지. 실망스러운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멋도 모르고 뛰어든 싸움에서 썩 멋지지도 않게 졌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상황이 달랐다면 난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

계속 핑계대며 뒷걸음질 치던 내가 그제야 보였다.

그걸 깨닫는데 한 해를 다 썼구나.


나는 질 수도 있고, 나에게 실망할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받아들이지 못해 나를 찔러댔을까


이제야 보인다.

진 게 아니라고, 난 사실 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고집부리는 내가 얼마나 지친 표정이었는지.


져도 괜찮은데.



방학은 끝났다.

마냥 뒤로, 뒤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방학, 안녕.

이제 개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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