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
날렵하게 용맹한 자태를 드러내기까지의 과정
연필 깎는 것을 좋아한다. 커터 칼이 나무 사이로 파고 들어가 깎일 수 있는 모든 종류를 애착한다. 심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깎아 내어 닳고 닳아 뭉뚝해진 것을 도려내 그 끝을 드러낼 때의 희열이 분명히 있다.
연필의 살을 도려내는 것에도 법칙이 있다. 함부로 쑤셔댔다간 주객이 전도되어 유혈사태를 목격할 수도 있다. 날카로운 칼은 연장으로써 겸허히 다뤄야 하며 그 연장을 쥔 내 손 또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일정한 각도와 속도로 균일하게 나무의 포를 떴을 때 비로소 연필은 매끈한 옷을 새로 입게 된다. 살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마음의 정화가 일어난다. 이보다 더한 희열과 평온함은 없다.
애꿎은 연필심만 바라본다. 날렵한 저 심이 언제쯤 뭉뚝해지나 바라만 보고 있다. 잘못하여 그 심이 부러졌을 땐 아쉬움 없이 도리어 쾌재를 부른다. 형형색색의 색연필과 서로 다른 크기의 연필들이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면 내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그렇다고 학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존재를 인정하고 깎일 때를 기다려 인내한다.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날카롭고 차가운 연장을 꺼내어 심호흡을 한다.
날렵하게 드러난 연필심은 그 자태가 용맹하다. 끝내주지 않는가. 그러니 내가 그들이 닳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때가 되면 그때가 온다. 그러니 때를 기다려 인내하고, 준비가 되면 커터칼을 손에 쥐고, 조신하게 나무의 포를 뜨고, 날렵하게 그 심을 드러내는 이 모든 과정은 연필을 연필답게, 나를 나답게 하는 시간이다. 이 모든 과정에 낭비되는 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