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끼는 천재 구소련이 만든 6S45PE
소련은 군사 기술이나 통신 기술에 있어서 폐쇄적인 그들의 장막 속에서 특허나 디자인, 상표등록과 같은 것에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무엇이든 베끼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베꼈다. 물론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도 엄청나게 많지만 베끼는 게 훨씬 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진공관 부문에 있어서는 대체로 자체 개발한 것은 별로 없다. 베낀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베낄 때 효용성 높게 베끼는 특징이 있다.
소련의 6S45PE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437A의 스펙을 그대로 카피했지만 크기도 줄이고 소켓도 일반 9핀 소켓을 쉽게 범용 할 수 있도록 변경했다. 또 마이크로포닉이나 발진도 없앴다. 이와 같은 것을 한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특허나 디자인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었다.
소련은 진공관 분야에 있어서 자료 수집 및 정리에 있어서도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전 세계 주요 진공관 2만 개를 선별해서 그것의 모든 데이터와 연구 자료를 하나로 집대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전 세계 진공관 대사전'이라고 할 만한 자료집을 남기는 역사적 위업을 이뤘다. 칭찬해줄 만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신기원을 이룬 진공관
그러면 이제 417A, 436A, 437A 진공관이 왜 그렇게 대단한 진공관인지 덧붙이고자 한다. 진공관은 제조에 있어서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영역이 있다. 즉, 증폭률을 높게 할 경우 전류는 상대적으로 적게 흐르게 된다. 반대로 전류를 많이 흘리는 경우 증폭률은 현격히 떨어진다. 완전히 서로 반비례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율배반을 최첨단 기술로 극복한 진공관이 웨스턴 일렉트릭이 1948년 개발한 417A, 436A, 437A이다.
417A는 TD2, TH1 등으로 불리는 광대역 증폭기의 초단에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라디오 시스템의 초단관인 셈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간 진공관이 갖는 기본적 문제점이었던 저 전류 타입을 고전류 타입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417A는 미니어처 진공관임에도 전류를 많이 흘릴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높은 전압으로 구동시킬 필요도 없었다. 25mA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당시로는 대단한 규모였다. 좀 전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진공관 내부 저항을 대폭 낮추고(1.8K Ohms), Gm을 극대화(24,000)했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증폭률(mu)도 43에 이르기 때문에 당시로는 이런 설계 자체가 혁명적인 것으로 보인다. 진공관 내부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
* 극한의 진공관
그런 의문은 417A를 토대로 개량된 436A, 437A의 제조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436A, 437A는 높이 50mm, 직경 28mm의 크기로, 1951년 처음 제조된 3극관 4극관 방열관이다. 이것은 L3라고 불리는 전송 장비에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T9으로 분류되는 약간 통통한 모양의 진공관으로, 엄청난 전류량과 증폭률을 자랑한다. 436A는 4극관임에도 불구하고 Gm이 30,000, 437A의 경우 Gm이 45,000에 이른다. 따라서 전류량도 40~45mA라는 경이적 용량뿐 아니라 증폭률도 47이나 된다.
436A, 437A의 그리드 직경은 0.00023인치이며 금도금되어있다. 때문에 육안으로는 그리드를 볼 수 없다. 게다가 1Cm도 안 되는 지주에 430회나 감아 놓았다. 실제로 진공관을 깨서 육안으로 그리드를 보면 단지 안개처럼 뿌옇게 보일 뿐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오늘날의 IC칩처럼 컴퓨터를 통해 정밀 기계로 제작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진공관은 제조 공정상 결코 기계로 자동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제조하는 과정 또한 정교하다. 그리드를 만드는 전해조에는 1리터 당 68% 금(金)청산 시안화물 15g, 청산 시안화물 55g, 수산화 시안화물 55g이 들어간다고 한다.
진공관 구조물 가운데 리드 선은 42%의 니켈과 6%의 크롬, 그리고 철과 실리콘, 망간 등의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1,235 °C 의 수소 속에서 형태를 만들고 산화크롬으로 표면을 처리하여 유리관에 접합한다. 이후 건조된 카본 가루 속에서 고압으로 산소를 제거한 뒤 용접한다.
히터는 1,700 °C 의 수소 속에서 산화알루미늄으로 코팅 및 절연 처리되어 있다. 플레이트는 백금을 입힌 탄탈리윰으로 코팅하며, 운모판은 500 °C 의 수소 속에서 15분 동안 표면 습기와 이물질을 제거한다. 진공관 유리는 리터 당 64g의 캘로나이트를 섞은 물로 20분간 세척하여 전기 오븐으로 말린다. 이외에도 상당히 복잡한 공정이 있다. 완성된 진공관은 5차례에 걸쳐 19시간 30분 동안 버닝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출고 전 마이크로포닉과 발진 테스트를 한다. 이 기술은 미국이 자회사 격인 영국의 STC사에서 3A/167M이란 형번으로 생산되기도 했다. 이 진공관은 1980년대 중반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진공관의 한계에 도전했던 이른바 ‘명작’이라는 점에서 진공관 애호가들의 뇌리에 오랜동안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