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새긴 나의 20대
지금 사는 집은 나의 자취 인생 여섯 번째 집이자 처음으로 경험하는 구축 빌라다. 입주한 지 6개월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고칠 게 줄줄이 소시지인 이 집은 며칠 전 변기를 뜯었다. 다들 그냥 산다며 집이 낡은 걸 인정하지 않는 집주인은 내가 귀찮기도 하겠으나, 입주 때부터 깨져있던 시멘트 사이로 물이 새어 나와 악취가 나는 걸 어떻게 참고 살 수 있나.
집주인은 화장지 때문에 막혀 그렇다며 나를 탓하더니 화장실 악취는 원래 나는 거니 환풍기를 항시 틀어놓으랬다. (예?) 이것저것 해봐도 해결은 되지 않고, 수십만 원 주고 사람을 부를 수는 없다기에 "제 돈으로 할게요." 하고는 기술자를 불러버렸다. 30분 만에 깔끔하게 재시공된 변기를 보고 집주인은 어디서 그렇게 싼 곳을 찾았냐며 명함을 받아갔고, 막힌 게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며 시공 비용을 보내줬다. 참, 웃겨.
생각해 보면 나는 유독 집에 민감하다. 깔끔하고 정돈된 집에 사는 건 모두의 바람이겠으나, 집에 문제가 생기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집주인이 해결해주지 않는 한 굳이 돈 들이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이 이해는 되지만 그냥 참고 사는 게 잘 안 된다. 그만큼 금액과 거주 방식을 떠나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리라. 집은 곧 나 자신이고, 나의 역사다. 그러니 먼저 내가 살아온 집들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서울 곳곳의 집들에 나의 20대가 새겨져 있으므로.
첫 번째 집.
2015년, 언니와 함께 살았던 학교 앞 4평 원룸.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오느라 미리 집을 구하지 못해 입학식 전날 하루 만에 후다닥 계약을 한 집이었다. 처음 서울에 올려 보내는 딸이 얼마나 걱정되었을까. 좁지만 깨끗하고, 학교 바로 앞이라는 위치, 여성 전용에 공동 현관까지 구비되어 그나마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드셨던 걸까. 4평에 월세 60만 원이라는 조건에도 여기가 제일 낫다며 계약해 주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전부 가늠할 수 없다.
집 현관을 열면 좁은 복도 양쪽으로 침대와 책상이 나란히 있고 방 끝엔 작은 부엌과 세탁기가 있었다. 부엌 쪽에 작게 나있는 창이 옆 건물 벽에 막혀 어두운 걸 빼면 혼자 살기에는 딱 좋은 집이었다. 그런 집에 언니와 함께 살았는데, 4평 원룸에 어떻게 두 사람이 살았는지 이제 솔직히 기억나지 않아 매번 얘기하곤 한다. 빨래를 하면 건조대는 어디에 펼쳐놓았지? 두 명 분의 옷은 다 어디에 넣어놓았지? 우리 진짜 거기 어떻게 살았지?
그럼에도 확실히 기억나는 건 다달이 침대에서 자는 사람을 바꾸었던 것. 몸집이 작은 우리라지만 둘이 눕기엔 침대가 좁아 이번 달은 내가, 다음 달은 언니가 침대에서 자고 나머지 한 명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었다. 그러다 이불 깔기가 영 귀찮으면 둘이 불편하게 끼여 잤던 날도 몇 번 있던 것 같다. 한참 메르스가 유행했던 때엔 서로 간병을 해주고 걱정된 엄마가 새벽 버스를 타고 오셨다가 함께 있기 좁아 저녁 버스로 내려가신 적도 있었다. 생에 처음으로 언니를 때렸고, 앞으로는 말로만 싸우자는 약속을 했었다.
두 번째 집.
2016년, 학교 앞 대로를 건너 5평 원룸.
옆 건물보다 높은 층의 남향이라 채광이 좋은 집이었다. 작은 주방은 현관 옆에 붙어있고 옵션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텅 빈 정사각 공간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한쪽 벽에는 책상을 2개 이어 놓고 반대편에는 잘 때만 펴는 이불을 접어두었다. 여전히 언니와 함께 살았지만 졸업반이었던 언니는 워낙 바쁘고 학교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어 거의 혼자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외로웠던 것 같다. 언니가 지금의 형부를 처음 만난 시기이기도 한데, 건물 앞에서 언니를 기다리는 그를 창 너머로 흘겨봤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혼자 있는 건 좋기도 했다. 언니의 짐이 널브러져 있으면 같이 사는 집인데도 내 공간을 침해받는 느낌이 들어 개인 공간의 중요성을 깨닫던 중이었고, 언니도 그랬는지 이틀에 한 번은 싸웠던 탓이기도 하다. 햇살이 따뜻하게 스며드는 낮 시간은 낭만적이었다.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 당근에서 30만 원에 구매한 야마하 전자 피아노를 창 앞에 두고 건반에 빛이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뮤지컬을 하겠다고 중도 휴학을 한 걸 넘치는 낭만 탓으로 돌려도 괜찮을까. 지하철 반대편까지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예술 대학 입시를 준비했었다.
세 번째 집.
2017년부터 2020년 봄까지, 망원동의 투룸
예대 입시에 떨어져 방황의 끝을 달리던 와중에도 계약 만기는 돌아왔다.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들어간 돈가스 가게에서 엄마는 나를 믿는다고 했다. 세상에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은 살 만하다 했던가, 나조차도 나를 믿을 수 없던 시기 그 말은 참 안심이 되었다. 망원동 집은 엄마의 응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 집에 살며 나는 학교로 돌아갔고, 교환학생을 떠났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집은 필로티가 있는 신축 빌라 건물의 2층으로, 14평쯤 되는 공간에 거실과 방 2개가 있었다. 널찍한 주방엔 큰 냉장고가 있고, 한쪽 방엔 창고로 쓸 수 있는 베란다도 있었다. 깨끗한 집에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이사 전 청소도구를 싸들고 찾아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끙끙대며 닦았었다.
개인 공간 덕에 삶의 질은 크게 높아졌다. 생활 패턴이 달라도 함께 살 수 있다니! 심심할 때 언니 방에 놀러 갔다 내 방으로 귀가하는 재미도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점은 싸운 뒤 얼굴을 안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린 달라도 너무 달라 죽자고 싸웠는데 나는 절대 먼저 미안하다 말하지 않았고, 그런 나는 언니를 심히 화나게 했다. 그럼에도 싸운 뒤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언니가 먼저 화해 신청을 하곤 했다. 당시엔 잘못한 게 없으면 미안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젠 말 자체로도 의미가 있음을 안다. 함께 사는 동안이 서로에게 관계를 탐구하는 시간이었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그랬던 것 같다.
망원동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하게는 망원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서교동이라는 동네로 망원, 홍대, 합정의 가운데 위치한 감성의 중심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주택이 모여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언니와 나는 동네 곳곳의 숨은 맛집을 찾았다. 집 뒤편에 레몬 마들렌이 맛있는 빵집, 길 건너 골목에 있는 젤라또집, 망원 시장 초입에 있는 미국 가정식, 시장 안쪽까지 들어가서야 있는 라오스 식당 등. 망원동이 유명해지면서는 동네에 놀러 오는 친구들을 이런 식당에 데려가면서 인스타 맛집과 진짜 맛집은 다르다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이곳 주민이라는 게 뿌듯한 동네였다.
8월의 어느 날에는 작고 보드라운 강아지를 새로운 식구로 맞이하기도 했다. 언니가 데려오자고 하니 괜히 들떠 호들갑을 떨었는데, 돌이켜보면 철없는 결정이었다. 온갖 것을 다 물어뜯고, 하루에 2시간을 산책해도 지치지 않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귀가 떨어질 듯 추워도 밖에 나가야 한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밉고 힘들기도 했지만 강아지를 키우지 않았더라면 책임에 대해, 동물과 환경에 대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규칙에 대해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경험해 배우는 건 너무나 다르다. 강아지는 내 삶을 넓혀주었고, 풍성하게 채워주었고, 언니와의 사이를 끈끈하게 연결해 주었다.
이후엔 서울로 이사 온 부모님 댁에 들어가 대학원 시절을 마저 보냈다. 안락한 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대학 시절 서울에서 살았던 모든 집이 안락했다. 혼자가 아니었고, 부모님의 지원으로 밥 걱정,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때론 당연히 여기기도 했고 때론 빚진 마음이 들었지만 학생이었기에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취업을 한 뒤 내 돈으로 집을 구해 살며, 정말이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러한 안락함은 쉽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