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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호수 Sep 30. 2023

솜이불 두 채

우리 집에는 내가 결혼할 때 혼수로 장만해 온 솜이불과 요 세트가 두 채 있다. 1인용 세트 2개로 하나는 연한 인디언 핑크색 스트라이프무늬이고 하나는 청회색 스트라이프 무늬이다.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웬 요와 이불세트가 혼수? 싶겠지만 내가 결혼했던 15년 전만 하더라도 전통과 현대가 약간의 혼재를 이루고 있던 세대였고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관을 가진 친정엄마는 한 번씩 시어른들 올라오셔서 너희 집에서 주무실 때 필요하다며 굳이 혼수품목에 포함시켜 두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던 그 이부자리세트를 15년 째 아주 잘 써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구만큼 큰 자리를 차지하는 매트리스는 손님용으로 구비해 두기가 불가능하다. 아예 손님방을 따로 마련한 옛날 대갓댁이나 지금 기준으로는 쓸모없이 작은 방이 여럿 있는 옛날 주택, 혹은 방이 여유가 있어 침대하나 정도는 여유를 둘 수 있는 엄청 넓은 평수 아파트라면 모를까 말이다.


하지만 국민평형 32평 아파트를 장만한 지 10년남짓 된 40대 부부의 삶에서 어디 그런 호사가 꿈꿀 수나 있는 일인가. 그나마 그 아파트도 아직도 대출이 남아있다.


솔직히 부부의 옷과 각종 짐들을 채워놓기에도 부족한 안방 옷장에는 옛날 엄마의 옷장처럼 이불을 넣을 공간도 마땅치가 않다. 친정집이나 시댁에 가면 12짝 장롱에 한 두 장은 이불장으로 크고 넓은 공간에 이불이 몇 채씩 들어가 있어서 우리 식구나 형제들의 식구들이 가면 사람 수 대로 이불과 요, 베개를 내준다고 장롱에서 끝도 없이 이불이 나오는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알록달록 색깔과 소재나 무늬도 통일이 안된 몇십 년 동안 쌓여온 이불들이 방마다 깔리고 우리는 마치 체육관에 모인 수재민들처럼 색색이 다른 이불을 겹쳐서 펴놓고 이 집 저 집 아이들과 섞여서 다글다글  잠을 잤다.


우리 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일도 없고, 그 사람들이 자고 갈 일은 더 없으니 사실상 이불은 오직 우리 식구 겨울용, 여름용 이렇게 있으면 그만인데 거기에 솜이불 두 채는 무겁기만 한 짐일 뿐이라 도대체가 왜 내가 이걸 받아서는 보관하느라 고생을 하는 거지 싶었다.  그런데 왠 걸 지방에 사시는 시부모님은 때때로 서울에 올라오실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평소에 쓰지 않아 깨끗하고 새것인 그 이불을 꺼내드리면 무척 좋아라 하셨다. 또한 한여름 너무 더워서 견딜 수 없을 때 우리 가족은 온 가족이 거실로 나와 에어컨을 틀고 그 요를 깔고 잤다. 우리 집은 요즘 나오는 시스템에어컨이 방방이 설치된 신축 아파트가 아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루라도 빨리 잠독립을 시키는 것이 지상목표이며 제발 좀 따로 자면 소원이 없겠다 했는데, 다 큰 아이들과 한 이불을 덮고 간혹 서로의 몸에 다리를 걸쳐가며 발로 차가며 자는 기분은 가족이 역시 가족이다 하는 따뜻함이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도 부끄럽거나 민망한 느낌 하나 없이 불편하긴 해도 가슴이 몽골몽골 해지는 기분이 여름이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남편 일로 인해 해외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서 그 이불의 활용도는 더 높아졌다. 친정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의 방문 때에 잘 꺼내 쓴 것은 당연하거니와 아이들의 슬립오버에서도 그 이불은 유용하게 쓰였다. 


아이의 침대로 벙커베드를 사주게 되면서 벙커베드의 아랫 공간이 이불장이 되었다. 이케아에서 구입한 이불 케이스에 한 채씩 차곡차곡 정리해서 쌓아놓으면 우리 식구가 쓰는 사철이불과 쿠션 베개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옷장에 넣지 않아도 되니 보관도 이제 크게 어렵지 않았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카피처럼 매트리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편리함이었다.


외국사람들은 침대생활을 하고 당연히 매트리스만 알지 요라는 것을 모른다. 해외에서 간단하게 매트리스를 대신하기 위해서 쓰는 에어매트리스라는 것이 있는데 튜브처럼 공기를 넣어서 빵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번 눕자마자 멀미가 나서 바로 내려왔다. 요는 접으면 매트리스의 절반도 되지 않는 공간에 보관할 수 있고 누웠을 때 약간 괴이긴 하지만 그래도 못 잘 정도는 아니다. 하루이틀 익숙해지면 또 별 무리 없이 적응이 되기도 한다.


내가 별로 반갑지도 않았지만 엄마가 사랑을 담아 만들어주신 이불을 잘 쓰다 보니 역시 부모님의 지혜는 나이를 먹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받은 이불은 외할머니로부터 내려온 사랑이다. 무슨 말이냐면, 사실은 그 이불은 외할머니가 나의 친정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해주신 이불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 20년쯤 전에는 아파트 현관마다 “솜틀집”이라는 광고자석이 붙어있었다. 아마 요즘 애들은 모를 것이다.


 “솜 틀어 드립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말일 것이다.


옛날에는 목화솜으로 이불을 만들었는데, 이 목화솜이불은 시간이 오래되고 계속 사용하다 보면 압력으로 인해 눌려서 점점 단단해지고 납작해진다. 

그래서 원래는 솜 사이사이에 공기층이 들어가 이불이 폭신폭신하고 따뜻해야 하는데, 이 공기층이 없어지면서 무겁기만 하고 따뜻하지 않게 된다. 이 솜을 틀어준다는 것은 눌어붙은 솜들을 다시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한 채의 이불이 두 채로 불어나는 기적도 생긴다. 


왜냐하면 난방이나 단열이 좋지 못했던 옛날에는 이불을 아주 두껍게 만들어야 했지만 아파트가 보편화되면서 겨울에도 집이 꽤 따뜻해지자 옛날처럼 두꺼운 이불이 필요하지 않고 무겁기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무거운 솜이불을 틀어서 좀 더 가볍게 만들고 남은 솜으로 얇은 이불을 한 채 더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목화솜이불을 갖고 있으면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주 수요층으로 보고 솜틀집들이 광고들을 했다.


우리 친정집도 그런 집들 중 하나였다. 


오래된 목화솜이불이 아주 많은 집이었다. 


친정엄마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부산의 친척집까지 피난을 가셔야 했다. 집이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재산이라고는 땅뿐이라 전쟁통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외할머니 역시 먼 친척이지만 작은 방한 칸이라도 지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 추운 겨울을 이불 한채 없이 벌벌 떨면서 두 아이를 끌어안고 밤마다 우셨다고 한다. 얼마나 추웠던지 그리고 이불 한 채 없는 것이 어찌나 서러우셨던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신 뒤 외할머니는 가진 땅에 목화농사를 지으셨다. 그리고 나의 친정엄마가 결혼할 때 혼수로 제일 좋은 목화만을 고르고 골라 아주아주 두툼한 이불을 열 채나 해서 보내셨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그 이불들을 평생 이고 지고 끌고 다니셨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내가 결혼할 때 ‘솜틀집’에 맡겨 두 개로 만들고 새로 호청을 맞춰 씌웠다. 솜틀집주인이 이렇게 좋은 목화는 본 적이 없다고 이제는 목화농사를 짓는 사람도 없고 대부분 다 인공섬유이니 절대 이 이불은 버리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하셨다. 


외할머니가 전쟁 중에 이불 없는 설움으로 한이 맺혀 지었던 목화농사와 그 목화솜으로 만든 이불은 친정엄마를 거쳐 내가 아주 잘 사용하고 우리 아이들도 그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자랐다는 생각을 하면 외할머니대에서 내려오는 내리사랑이 느껴진다. 나는 본 적도 없는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시는 할머니를 상상하게 된다. 친정엄마는 현금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 이를테면 가구나 그 당시 유행하던 가전제품을 사주지 않고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이불을 뭣하러 이렇게 많이 해줬냐고 외할머니에게 따졌다지만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그 당시 유행하는 가전제품을 사주셨다면 몇 년 지나 버려지고 잊혔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손수 농사지으시고 이불을 만드시고, 친정엄마의 장롱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고 버티다 드디어 내 대에서 빛을 발하는 솜이불은 이번 추석에도 여지없이 제 역할을 다하고 다시 고이 이불보관함에 들어갔다. 


요즘 나오는 가볍고 따뜻하다는 거위털이불보다 무겁지만 지그시 눌러주는 그 묵직함에 나는 오히려 더 따뜻하고 잠이 잘 오는 것 같다.  


외할머니는 내가 둘째 아이를 낳고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마지막을 친정엄마집에 계셨는데, 당시에 나도 해외이사를 준비하는 중이라 친정엄마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달가량이었지만, 외할머니, 친정엄마, 나, 그리고 나의 딸들 이렇게 4 세대가 한 집에서 지냈다. 할머니의 마지막 한 달이 증손주들과 함께였다는 것이 큰 위안 중에 하나이다. 큰 아이가 태어난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외할머니가 내 아이를 안아주고 씻겨주기도 하셨는데 둘째 아이는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고 안지 않으셨다. 왜 안아보지 않냐고 물었더니 혹시 떨어뜨릴까 봐 겁이 난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나에게 그 이불을 직접 주신 것도 아닌데 그 이불을 꺼내어 쓰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께 그 이불 저랑 아이들이 정말 잘 쓰고 있어요. 앞으로도 몇십 년도 더 잘 쓸 거예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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