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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Aug 31. 2023

상처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백만엔걸스즈코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결국 누구보다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스즈코

             스즈코가 처한 상황, 하루 아침에 범죄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 상황은 스즈코도 스즈코 인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본인이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살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은 터져버렸고, 그 이후의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옛 동창들의 왕따는 스즈코가 감당해야만 하는 문제들이었고, 스즈코도 감옥에서 나와서 텅 빈 거리를 걸으면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고민하며 노래를 불렀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착잡한 마음에 대비되게끔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즈코는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백 만엔을 열심히 벌어낸다. 스즈코에게 그 당시는 도피라는 키워드는 생존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동네를 벗어나야 내가 산다"는 마음이었겠지. 그리고  백만엔 이 모일 때마다 도망쳐온 바다, 산골, 도시 그 어느 곳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바닷가에서 만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에게서는 극강의 철벽을 시전하고, 산골에서도 자신의 상처에 얽매여 살고 있는 그녀에게 좁디 좁은 산골 사회가 표출하는 공격성 때문에 그녀는 더 움츠러들게 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한다. 백 만엔은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범죄자입니다. 나를 깊이 알아갈수록 당신은 날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스즈코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밝게 살아가려고 하는 스즈코의 인생 목적이자 자기 혐오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잘못 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부정적인 세상의 시선에 굴복하는 스즈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즈코는 그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은 채, 혼자 세상을 맴돌며 가족에게까지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는데, 스즈코의 동생은 스즈코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피해자로 현실을 도망가고 싶어하는 동생은 스즈코를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동창에게 놀림 받고 있는 스즈코가 당당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동생에게 인상적으로 남겨졌기 때문인데, 동생의 인식과는 달리 스즈코는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동생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동생은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계속 살아가보겠다는 결심을 담은 편지를 스즈코에게 전달함으로써 스즈코와는 다른 선택을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 입장에서는 둘 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둘 다 서로가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설정은 꽤나 흥미롭다. 거지 같은 현실에서 도망친 여자, 그 현실을 그대로 감내하고 있는 동생, 은근히 비교가 되면서 보고 있으면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표면적 진실 말고 그 이면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 말들은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단지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 나와 관련없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평가내리는 모습들을 제대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비판하기에는 내 마음이 콕콕 찔리는 이유는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스즈코의 남자 친구는 스즈코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정착 욕구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다. 남자 친구의 거짓말만 아니었더라면 스즈코는 계속 남자 친구 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앞서 등장한 두 장소에서의 떠돌이 생활과 그로 겪게된 오해와 편견들로 지칠대로 지친 스즈코에게 제 때에 나타난 사람이었는데, 스즈코가 백만 엔을 다 모아 떠나갈까 두려워 돈을 빌리며 오해를 사기 충분한 행동을 한다. 이는 스즈코가 떠나려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이 남자는 스즈코를 붙잡으려다 오히려 스즈코를 떠나보낸 것이다. 머리를 잘 못 쓴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솔직히 "백만엔이 모여도 나를 봐서라도 떠나지 말라"그 말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나 답답했었다. 하지만 이런 계기가 있었기에 스즈코는 자신이 굉장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동생보다도 더 성숙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모든 고통에는 좋은 대가도 함께 온다. 이유없이 지나가는 고통은 없는 것이다.
             영화는 열린 결말인데, 나는 스즈코의 마지막 대사와 독백 대사들로 보건대 스즈코는 남자 친구와 재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걸어나갈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시 떠나간 곳에서는 계속 지금까지 살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상황, 상처에 정면 돌파하는 용기 있는 모습, "나는 잘 못 한 것이 없어"라며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살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스즈코가 자신에게 내려야 할 처방은 떠돌이 생활이 아니라 어쩌라고 식의 마이웨이의 당당한 마인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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