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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Jan 03. 2021

나를 괴물로 만드는 괴물 같은 권력

20대 뜨내기가 왓챠에서 영화 신문기자를 보고 쓰는 권력에 대한 생각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지만 대체로 정치적인 의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다. 고로 이 글은 내 정치적 편향성을 이야기하고자 쓰는 글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신문기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권력이 가지는 관성에 대해 쓰는 글이다. 하나의 세력이 권력을 가지면 가진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무고한 희생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가 싶어서 쓰는 글일 뿐이다. 특정 세력, 집단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기 때문에 특정 세력이 연상되게끔 하는 단어는 하나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일반성에 대한 개인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 글이 맘에 안 들 수도 있지만 그건 아마 그 사람이 찔리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 관성


스기하라 타쿠미는 일본 정부에게 불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관계자들과 일본 정부의 연관성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관계자들에 대한 가짜 뉴스를 유포시키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스기하라가 일하는 부서의 모습을 풀 샷으로 찍은 모습은 적막 속의 기괴란 이런 것일까 싶은데,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행되어야 하는 누군가의 희생을 위해 하나의 부서가 존재하고, 수십 명의 엘리트 공무원들이 댓글 조작, 가짜 뉴스 유포를 위해서 매일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 워리어가 되는 꼴이라니. 정말 무섭도록 기괴한 장관이었다. 스기하라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 배치된 그저 일개미일 뿐이었다. 권력자들은 자기가 쟁취한 권력의 관성의 법칙에 갇혀 그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목표 아래 악행을 멈출 줄을 모른다.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려고 한다. 하지만 썩어가는 집단의 규칙에 잘 적응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라고 자각을 해버리는 바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후자처럼 깨끗하고 공정했던 집단조차도 권력층이 되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크고 작은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 악행이 도를 넘으면, 흙탕물이 되어버린 집단의 터져 나오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내부고발자라고 한다.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동료의 죽음 이후로 각성한 스기하라는 결국 내부고발자가 된다.


관성의 흐름을 멈추고자 하는 사람들


스기하라가 내부고발자가 되는 데까지의 과정 속에는 사회부 신문사 기자인 요시오카 에리카와의 접촉이 있었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스기하라에게 요시오카의 동료의 죽음의 이유를 파헤치자는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을 것이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관성의 법칙처럼 이미 가속도를 붙여 움직이고 있는 권력의 악행을 멈추기 위해서 정부의 일개미와 외부 지식인의 합심 만으로는 악행은 멈추지 않는다. 판도를 바꾸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은 언론의 힘을 빌려 이런 악행에 분노하는 여론을 만들고자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정 농단 사건으로 한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는 그 국정농단에 분노하는 국민적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론이 생겨나는 데에 언론이 정말 큰 역할을 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기능에도 불구하고, 관성의 법칙을 어기려는 자들은 가로막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가짜 뉴스, 진실의 조작이 진짜로 발생했는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구분을 지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내부고발자와 양심 있는 언론인의 합심으로 진실을 고발하는 기사를 작성해서 유포해도 정부 차원에서 미리 낌새를 알아채고, 더 자극적인 반박 기사를 내놓으면, 사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렇게 헷갈리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각자의 해석으로 편을 가르게 된다. 모두 진실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같지만 제대로 팩트 체크를 할 능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이분법적으로 내가 믿고 있는 쪽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상대방을 위선자로 몰아가게 된다. 그 결과, 정작 지탄받아야 할 악의 축은 비난을 좀 덜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영화 속에서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부는 하나 된 여론이 정권을 바꾸게 되는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고, 그 현상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 진실을 외치는 자들을 흠집 내는 반박 기사를 내보낸다. 영화 상에서는 그 작전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해석된다. 스기하라는 위에서 자신의 삶을 모두 짓밟으려는 의지를 확인하고 난 뒤에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요시오카를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고멘이라고 하는 듯한 입모양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스기하라는 정의를 찾아 나섰지만 결론적으로는 위에서 짓누르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하고야 만다. 절망한 표정으로 동지에게 건네는 미안하다는 말이 스기하라의 마지막 대사이고, 너무나도 이해되는 내부고발자의 현실이라서 씁쓸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내부고발자들을 관찰자의 시선에서만 바라만 봐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집단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위의 잔인함을 인지하고 있는 수많은 일개미들이 각성했을 때, 수많은 갈등(내가 한 선택이 잘 한 선택인가, 내가 한 선택으로 나의 가족은 안녕할까)을 거쳐야만 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런 갈등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부당함을 고발했으나 실패했을 때에 자신을 지지해주던 기반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나간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온전할 수 있을까 싶다. 이미 흙탕물이 되어 버린 사회에게 다시 정수 시설을 설치해 주겠다고 하는 개인이 존재할지언정 사회 속 집단이 자신의 집단은 흙탕물이 아닌데, 왜 더러운 물 취급하냐고 정수 시설을 제안한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가면, 그 개인은 과연 얼마나 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 스기하라의 삶의 빛을 잃은 표정과 요시오카에게도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압박 등이 비단 일본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보면, 내가 살아가는 사회는 과연 어떤 곳인가를 꾸준히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일반 시민들도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것보다는 토론 문화에 더 익숙해져야 그 사회는 권력 집단이 만들어놓는 함정에 좀 덜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토론은 기본적으로 내 생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이지만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나은 논리를 들고 나오면 백기를 들 준비도 해야 한다. 그것은 절대 내가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에 더 치부를 느껴야 한다. 일반 시민인 우리부터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똑똑한 시민이 되는 길이고, 똑똑한 시민이 되면 권력의 횡포에 덜 휘둘리는 시민들이 될 것이며, 그런 사회의 일원들은 스기하라 같은 내부고발자들의 완충제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본 리뷰 영화는 넷플릭스가 아닌 왓챠에서 관람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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