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제안을 받은 학교 음악 선생, 조 가드너는 뮤지션이 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다. 재즈 뮤지션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음악이 운명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뮤지션으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가 주어져 너무 신난 탓에 오두방정을 떨면서 가다가 맨홀에 떨어져 버려 '저 머나먼 세상'으로 갈 위기에 처한다. 머나먼 세상, 즉, 저승으로는 가기 싫은 조는 머나먼 세상의 반대를 향해 뛰어가다가 경로를 이탈해 태초의 세상으로 불시착한다. 태초의 세상이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영혼들이 성격을 결정지을 수 있도록 인격 형성 교육을 하는 세상인데, 조는 그 곳에서 삶을 살아갈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영혼, 22번을 만난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영혼, 22번과 육체는 있지만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해버린 조 가드너의 새 삶 찾기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1. 현대인의 분신, 22번
태초의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영혼들이 존재한다. 영혼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찾아야만 지구에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할만한 관심사란 관심사는 모두 모은 공간이 있다. 하지만 22번은 한 번도 가슴이 뛰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1억 개가 넘는 영혼들이 지구로 갈 때, 22번은 수많은 명사들의 영혼들을 멘토로 삼은 덕에 철학적인 지식, 이성적 사고에는 통달했지만 지구로 가서 살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1억 개의 영혼들이 모두 자신들의 삶의 이유를 찾아갈 동안에도 찾아내지 못해 태초의 세상에서 가장 골칫덩어리였다.
삶의 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단히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나오는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인간의 내적생활에 있어서 사는 목적과 의미, 가치를 느끼고 있는 정신상태, 또는그 원천ㆍ대상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 자질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자발성을 가지고 발하게 되는 개성적인 것이며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응, 사명감, 참다운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삶의 보람은 그 인간의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한다. 비록 그 과정이 고통ㆍ노력을 수반하는 것일지라도 그 삶의 보람을 향해 전진하는 자세를 가져다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삶의 의지 [will to live] (간호학대사전, 1996. 3. 1., 대한간호학회)
22번은 육체를 가진 영혼이었다면, 분명히 정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영혼이었을 것이다. 22번에게 인간의 육체가 주어졌다면, 인생을 사는 목적도 없고, 매 순간순간 즐거움이 없는 상태였을 테니, 조울증, 우울증, 무기력증 등등의 현대인의 흔한 정신적 질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22번은 육체는 건강하지만 정신은 병들어버린 현대인들을 투영시킨 캐릭터였던 것이다.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도 많이 들리지만 저멀리 있는 연예인의 삶 뿐만 아니라 뉴스만 바라보고 있어도 심심치 않게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한다. 더 이상 인간 세상에 미련이 없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을 그들은 수많은 좌절과 공허를 견뎌왔을 것인데, 그 공허함을 이기는 방법은 영화에서도 알려주고 있다. 삶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22번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현실을 조목조목 알려줘가며 그들의 현주소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해줄 것이 아니라 빈 말이더라도 위로가 될 말이나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객관적으로 맞는 말을 해줘도 그들의 소위 너무 논리적이고 소위 "맞는 말"은 그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힌다. 22번이 들어왔던 수많은 옳고, 입바른 말들은 22번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넌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말 한마디 해줄 수 있는 참어른이 한 분이라도 있었어야 했다. 그래서 22번에게 마더 테레사, 칼 융 등의 위인들보다 너는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말 한 마디를 해 준 하찮은 음악 선생 조 가드너가 22번에게는 참어른이었던 것이다. 인생의 멘토는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스티브 잡스일 필요가 없고, 주변 편의점 사장님일 수도 있고, 내 엄마일 수도 있다. 당신의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에.
2. 조 가드너에게서 보이는 장자
22번의 삶의 의지를 일깨워주었으며, 그의 지구통행증을 얻게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지 곰곰이 되짚어보자면, 22번은 조 가드너의 몸을 빌려 인간의 삶을 체험해보았지만 딱히 대단히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한 거라곤 사고나 치면서 돌아다녔을 뿐이었다. 조 가드너의 데뷔 공연을 망칠 뻔한 일들이었다. 조의 고용인에게서 미친 놈으로 오해를 받게 하질 않나, 조 가드너의 옷을 찢어먹기도 하고, 조 가드너의 머리도 거지꼴로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22번은 조 가드너에게 닥친 문제들만 해결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어야 했지만 그 사이사이 순간들 속에서 22번은 조 가드너의 눈을 빌려 예쁜 풍경,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자신의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카페 안 사람들을 보고, 길가에 흔하게 파는 피자의 맛을 음미하는 등 소소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조가 자신의 인생의 운명과도 같은 목표라고 믿었던 뮤지션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멀리 있는 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22번은 내 옆에 있는 잔디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답잖은 것들에 홀려 있는 22번에게 조가 건넨 말
하늘을 보거나 걷는 건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는 멀리 있는 꿈을 동경하느라 정작 나의 빛나는 현재를 즐기면서 살지 못했던 조 자신의 불행을 잘 보여주는 대사였다.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이란 이제 감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크다보면,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비관하게 되고, 자신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성과를 기뻐하지 못하게 된다. 조 가드너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꿈을 이루고자 하는 조급함만 가득하다 보니, 그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우울한 기억들만 있던 것이다. 자그마한 성과들이 모여 자신의 자존감이 되고, 그 자존감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혀나가는 건데, 조 가드너는 꿈이 발산하는 빛의 그림자에 갇혀서 빛을 향해 다가가려 발버둥칠수록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었다.
이런 조 가드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나는 중국의 한 철학자, 장자의 소요유가 떠오른다.
“북명, 즉 북쪽바다에 물고기가 사는데,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붕은 바다의 기운이 움직여서 큰 바람이 일면 그걸 타고 남명, 즉, 남쪽바다로 날아간다.”
사람들은 인생에는 특정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크기의 집과 특정한 분야의 직업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동경을 조금은 받을 수 있고, 가끔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을 갖는 것. 그것이 평범한 삶이라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나는 별로 성공, 명예, 좋은 직업, 돈 많은 이성친구 그런 거 관심 없어. 그저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직업만 있으면 돼.”라고 하지만 막상 내 옆에서 나와 비슷한 레벨로 살던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레벨로 날아가버리면 마음의 조급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을 테지만 내적 갈등 지수는 한없이 올라갈 것이다.
사람마다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또한, 탕지문극에서의 북쪽바다에 서로 독립적으로 살고 있는 곤과 붕의 이야기, 작은 존재로 비유된 매미와 어린 비둘기와 큰 존재를 상징하는 메추라기 이야기도 있듯이 작은 존재에 갇혀서 큰 존재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음을 질투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더 먼 미래에 질투했을 법한 시간에 자신에게 투자했을 시간이 빛을 발하는 날이 분명히 올 테니까 말이다. 내가 남을 바라보는 시선,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오롯이 나의 삶이 보일 것이고, 그렇게 나의 삶에 집중한다면, 분명히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아니, 좋은 성과가 없어도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 좋은 성과가 없어도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고 행한 모든 과정 속에서 충만함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신경쓰는 마음,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면, 몸도 마음도 한층 더 가벼워질 것이고, 내가 집착하던 나만의 목표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좋은 기회가 왔을 때에 잡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더 잘 되었다는 사실에 질투만 하고 있고, 그 사람을 이기겠다는 일념 하에 하나의 세속적 목표만 바라만 본다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 바람에 편승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조 가드너 같이 현재 가지고 있는 꿈이 내 인생의 정답인 것처럼 행세하는 현대인들에게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장자의 마인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아주 긍정적인 신호이지만 그 꿈의 이면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주는 이런 메시지는 아주 의미있을 것이다. 영화는 자신의 인생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나는 선택받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너무 멀리 있다고 우울해하기 보다는 목표가 있는 곳까지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채워가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당신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인생의 목표는 바뀔 수도 있고, 당신이 꿈꾸는 미래를 박제하고 살 필요는 없다는 없음을 강조하면서.
끝으로, 헐리우드의 상업 영화에서 동양 사상의 느낌을 느끼다니,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의심하긴 했지만 서양 영화에서 동양 사상을 찾았음을 신기해 할 게 아니라 서양이든 동양이든 인생의 진리는 어차피 다 통용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신 모든 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조금 더 여유를 찾고, 목표에 갇혀 아등바등 사는 삶에서 벗어나 조금 더 즐기면서 천천히 살고 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