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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초 Jan 12. 2022

연습의 원리

다작

나의 글쓰기 스승은 올 해는 다작의 해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백지 위 검은 글씨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익숙하다. 흰건반과 검은건반. 열 살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를 해서 지금까지 반주자로 살고 있으니, 전공자는 아니어도 내 삶의 많은 지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시간들에 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를 떼고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배워 나가다가 처음 '재즈'라는 장르를 접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실용음악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교회 언니가 Bill Evans의 <We will meet again>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전율을 느꼈다. 무작정 언니에게 이 곡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재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듣고 또 듣고, 치고 또 치다 보니 곡을 전부 외워 버렸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 곡은 Bill Evans의 형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난 뒤, 형을 애도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곡을 알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나도 오빠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 후로 한동안, 집착하듯 이 노래에 빠져 살았던 기억이 있다. 운명처럼 내게 다가온 노래라 여기며 말이다.


   이 곡으로 재즈에 입문하며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글쓰기 초보로 글을 배워나가다 보니, 반주를 배울 때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드 반주는 클래식처럼 정형화되어 있는 악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같은 곡을 치더라도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다르게 연주하는 묘미가 있다. 같은 글감을 갖고 글을 쓰더라도 다 다른 글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처음 레슨을 받을 때 했던 것이 나쁜 습관을 빼는 것이었다. 꽉꽉 채워 치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단순하지만 4비트에 맞춰 정확한 코드를 누르는 것을 연습한다. 그리고는 여러 가수들의 곡들을 카피했다. 다른 사람의 반주를 듣고 똑같이 따라 치는 것이다. 잘 안 들리는 코드는 구간반복을 해놓고 귀를 뚫는 시간을 갖는다. 한 곡 카피가 완성되면, 12 key로 조를 바꿔 연습을 한다. 연습실에 갇혀 연습 또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노래를 들리는 대로 따라 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연주를 하게 된다.


   글쓰기에서도 처음 배운 것이 형식이었다. 군더더기 있는 문장들을 줄이고 접속사나 중복되는 단어들을 빼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모방하며 따라 써 보는 연습도 한다. 다독과 다작을 하며 기본기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게 된다.


   연습실에 처박혀 있던 여러 날들이 떠오른다. 건반 위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영역이든 임계점을 넘어야만 성질이 변하게 되는 것 같다. 반주자로 살며 실수했던 에피소드들은 정말 많다. 그 창피함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잘 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글쓰기에 있어 나는 이제 막 바이엘을 뗀 기분이다. 더 자유로이 글을 쓸 날을 기대하며 이런저런 연습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쌓인 시간은 언젠간 빛을 발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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