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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해공 Dec 14. 2020

번아웃

번번이 지치고. 아픈데. 웃으며 참다가 골로 가는 병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


"저 그만둘게요."

"뭐? 지금 이 시점에 육 카피가 할 말인가?"

"도저히 못 버티겠고, 이제 그만 할게요."


 새벽 4시 30분, 나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자료와 약병, 책들을 박스 안에 던져 넣었습니다. 팀장님은 나의 돌발 행동을 보고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 편집실에서 웃으면서 일하던 사람이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그러는 걸 보니 뒤로 넘어갈 일이지요. 그것도 새벽 4시 30분에, 광고주 제안을 몇 시간 남기지 않은 중요한 시간에 말이지요.


 실은 나 자신도 이런 나에게 놀랐습니다. 분명히 잘 참고 일하는 것 같았는데,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잘 버텨낼 것 같았는데 왜 이럴까? 생각하면서.

 회사를 그만둔 그 달엔 지독히도 일이 많았습니다. 빡빡한 광고주의 타임라인 때문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같이 철야를 해야 했죠. 3,4일 간격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회의를 하고, 광고주에게 제안하는 똥줄 타는 일을 10년 넘게 해왔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바로 한 달 전까지 병가를 지내다 온 내게 회사가 내려준 선물은 고맙게도 '열나 빡셈X만렙' 그 자체였습니다. 병원에서 받아온 약 종류만 7가지, 현대의학이 만들어낸 기똥찬 약발과 짱돌 같은 의지만 있으면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아니더군요. 이러다 어느 날 돌연사로 죽거나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육 떨림'이라는 이상한 증상이 몸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가끔 가슴 뛰는 불면의 밤을 보내다 출근해야 했던 그때부터 말이지요.

의사 선생님들은 모두 한결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나는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못 찾으니까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라고 치부했지요.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내지르던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진작 일을 쉬어야 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마음은 잘 알아차리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퇴근길에 이유 없이 눈물 흘리던 나,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은 백지를 볼 때마다 멍해지는 나, 주말엔 떡실신이 되어 잠만 자던 나를 잘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인간에게는 '에너지 한계의 법칙'이 있다고. 인간에게 무한한 에너지란 존재하지 않으니 쓴 만큼 반드시 채워줘야 한다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쓴 만큼 충전할 수 있을까요? 아직 이것에 대해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야 하나하나 조금씩 알아가고 있거든요.) 하지만 경험적으로 체득한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 갑자기 특별한 이유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른다면,

잠시라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이런 증상이 지속된다면 병원에 가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둘, 자신을 몰아붙이는 환경과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할 수 있다면 재빨리 벗어나세요.

한 동안 나는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을 이해하려는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괜찮은 척 웃으며 버텨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더군요. 방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는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해줘야 합니다. 폭발하기 전에요.


 셋.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염두에 두세요. 이것은 진리입니다.

 '나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다.'

 인생은 생각보다 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분투해야 합니다. 사람과 일, 그리고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와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먼저 '나'를 챙겨야겠습니다.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나부터 바로 서야 다른 누군가를 세울 수도 있으니까요.


 글을 쓰다 보니 이 번아웃이라는 놈이 지독히도 나쁜 놈이란 생각이 드네요. 어느 시점부터 발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고, 멀쩡해보이는 사람을 한 순간에 괴물로 만드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뼛속까지 저릿한 고통을 경험했으니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이제 다시는 번번이 아픈데 아닌 척 웃으면서 견디지 않으렵니다. 그 누구보다 내 몸과 마음을 먼저 보살피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산책을 해야 할 시간이군요. 글 쓰면서 비워낸 에너지를 다시 채우러 이만 나가봐야겠습니다. 코끝 시린 겨울이지만 이 시간을 포기할 수 없지요.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도 각자 ‘나를 돌보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채우시기를 바라며, 다음 글에서 또 만나겠습니다. 오늘 밤도 잘 쉬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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