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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Jan 29. 2020

한국축구에는 없고 일본축구에는 있는 것

아일랜드 축구팬에게 차마 못 보내고 있는 사진 한 장

"Irish?! Welcome!" 상암월드컵경기장 풋볼팬타지움에서 아일랜드 관광객을 만났다. 그는 막 풋볼

팬타지움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아일랜드는 특히 좋아하는 국가라 내심 반가웠다.


"2002 한/일 월드컵은 아일랜드가 지금까지 마지막으로 진출한 월드컵 대회지?"

"16강에서 스페인을 이겼으면 한국이랑 맞붙었을 텐데 말이야."

"2010 남아공 월드컵 플레이오프 프랑스 경기는 명백한 오심이었어."


동방의 먼 나라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이, 자국 축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꽤나 자세히 이야기하니, 신기한 모양이다. 축구는 묘한 힘이 있다. 서로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타지에서도 손쉽게 친해진다. 물론 라이벌 관계 등 문제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금방 친해진다. 다른 스포츠, 음악 등 문화 전반이 마찬가지일 테다. 아마 축구가 가장 보편성이 큰 스포츠기 때문에, 축구를 매개로 친해지는 경험이 잦기 때문 아닐까.


그는 '북아일랜드'에서 왔다고 한다.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대체로 아일랜드 대표팀에 동질감을 느끼는 편이라고. 많은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리그 '셀틱' 혹은 '글래스고 레인져스' 중 한 팀을 응원한다는 말도 전해줬다. 자신은 셀틱을 좋아한단다. 스코틀랜드 셀틱과 레인져스는 종교를 매개로 얽힌 라이벌 관계다. 아일랜드 - 영국 간 복잡한 역사, 영국 안에서도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즈로 나뉘는 이해관계들, 축구는 사회적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축구 이야기를 통해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 물가에 치를 떨다 한국으로 넘어온 관광객 중, 비교적 저렴한 물가 등 한국에 매력을 느낀 아일랜드 사람들이 많았다고, 영어 교사 등으로 한국에 장기 체류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한일월드컵에서 아일랜드는 월드컵 조별예선 세 경기를 일본에서 치른 후 16강 스페인 전을 한국에서 치렀다. 이 역시 그를 만나지 못하면 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근데 조금 민망했다. 풋볼팬타지움 안에는 한일월드컵 당시 아일랜드 관련 어떤 내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은 어땠냐"는 상투적인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동시에 조금 부끄러웠다.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일본은 관련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일본축구박물관이 한일 월드컵 표기와 관련해 '한국-일본' 순서를 지키지 않고, 일본-한국 순서로 기재한다는 사실을 꼬집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공식' 명칭이기에 일견 타당한 지적이지만, 이를 지적하기 위해선 우리도 최소한은 갖춰야 한다. 일본 박물관은 적어도, 공동개최한 한국 어느 도시에서 경기를 했는지, 진행과정은 어땠는지 등, 공동 개최국 한국과 출전 국가, 경기 결과 등 대회 전반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공동개최한 일본 경기장은 어디가 있는지 정도는 소개하는 공동개최국에게 최소한은 하고 나서 일본박물관의 표기방식을 지적하는 게 순서 아닐까?

일본축구박물관은 2002 한일월드컵에 진출한 32개팀 유니폼과 대표팀 사진, 포메이션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아일랜드 대표팀이 속했던 그룹 E 경기 내용.
일본축구박물관이 소개하고 있는 아일랜드 대표팀.


한국이 한일월드컵을 위해 제출한 입찰문서와 한국이 발행한 월드컵 기념주화, 일본축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좌) 일본박물관이 소개하고 있는 한국 개최도시들, 우) 2002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조직위원회


일본과 비교하면 2002 월드컵 관련 전시는 비중이 극히 적고, 이마저도 한국 대표팀에만 집중돼있다.



상암에 있는 풋볼팬타지움은 대한민국이 개최한 '2002 한일월드컵'보다는, 한국이 이뤄낸 '4강 신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자의식이 넘쳐 나는 공간이다. 넘치는 자의식이 한일월드컵 대회 전체가 아니라 한국이 거둔 성적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저 멀리 아일랜드에서 온 축구팬이 자국 축구와 관련한 내용을 만날 수 없는 이유다. 이 지적은, 풋볼팬타지움을 찾은 벨기에 관광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벨기에 청년과 아빠가 함께 찾았다. "팬타지움 어땠어요?" 불어를 못해 영어로 묻자 청년, "그냥 한국말로 할게요?"라고 답한다. 청년은 한국에 정착해 있었고, 아버지가 아들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고 한다. 둘 다 축구를 좋아하는지라 팬타지움을 찾았다고, 그는 혹평을 쏟아냈다. 


"FIFA 월드컵 대회인데 다른 국가들 내용을 볼 수도 없고, 한국 내용밖에 없었다. 특히 대회 결승전을 상징하는 브라질 호나우두, 독일 올리버 칸 같은 선수를 찾아볼 수 없는 건 심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좋은 성적을 거둔 건 맞지만, 대회 전반을 자세히 소개하는 건 별개다." 아주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꽤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는 청년에게 질문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지..

벨기에 청년이 혹평을 쏟아내며 예로 든 올리버 칸과 호나우두는 대회 결승전을 상징하는 선수들이다. 일본축구박물관
대회 결승전 장면들. 일본은 결승전 당시 잔디도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다시 아일랜드 청년으로 돌아가, 그에게 스타디움 투어를 권했다. 멀리서 왔는데,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기꺼이 수락했고, 함께 상암월드컵 경기장을 둘러봤다. 스타디움 안에는 역대 월드컵 선수단 사진이 전시돼 있었고, 그는 셀틱에서 뛰었던 차두리와 기성용을 알아봤다. 올해 초 일본축구박물관에서 아일랜드 대표팀을 접했며 그가 생각났다.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일본에는 있어!"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사진을 보내주지는 못하고 있다.


스타디움 투어를 하며 선수를 살펴보고 있는 아일랜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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