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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준 Feb 02. 2020

BTS가 만들어 준 인연

여기 앉아도 될까요?”


매장에 들어온 그(녀)가 내게 물었다. 작년 이맘 때, 프랑스 파리를 홀로 여행하다 들린 스타벅스 매장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2층 매장, 빈자리가 없었다. 한국 카페에서 '의자를 빌리겠다'는 부탁은 들어봤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아도 되겠냐'는 부탁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 이게 유럽이구나! 지갑 잘 챙겨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그럼요."


그는 가방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렸고, 별다른 계획없이 파리를 떠돌던 나는 "이제 어디가지?"하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렸다. 누가봐도 관광객임이 분명했나 보다. 잠시 후 그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 한국이요." 

"한국이요..?! BTS 알죠?!"

"BTS? 왜 몰라요, 당연히 알죠."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국 어디서 왔느냐, BTS 좋아하느냐, 내가 BTS를 아주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있던 그림도 내려놓고 자기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한국에서 왔다'는 한마디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획없이 혼자 파리를 돌아 다닌지 3일째, 나도 말붙일 사람이 생긴 상황이 썩 귀찮지 않았다. 내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 기차티켓을 끊어준 유럽 역무원 이야기, 한국 아이돌 이야기 등등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그가 내게 권했다. 여기 가까이 한국음식거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익숙한 단어들이 채우고 있는 거리를 걷다가, 어느 한식 매장에 들렀다. 파리 현지인들이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공간, 정말 신기했다. 나는 이전까지 '한류'라는 단어를, 왜 '한류'라는 단어에 많고 많은 표현 중 '흐름(流, 흐를 류)'이라는 표현이 붙었는지, 영어 'Korean Wave'에서 'Wave'의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깊이 이해하지도 못 했다. 내가 미디어 밖에서 처음으로 '한류', 강력한 흐름과 파동을 느낀 날이었다.




"......어?! 동훈이?!"

"??!!!!! 어?! 형!"


그리고 동생이 거기 있었다. 우리 둘 인연, 201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완연한 가을 덕수궁이었다. 고종황제가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을 맞이하는 접견례 재현 행사가 있었고, 현장 스태프로 함께했다.근무기간 4일, 첫날 무대세팅부터 중간 공연진행 마지막 뒷정리까지, 비교적 널널한 편이었다. 소위 말하는 꿀 보직, 자연히 근무하는 스태프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그 중에서도 동훈이와는 금세 친해졌다. 동훈이는 연극 배우다. 보통 또래들과 다른 스스로 길을 개척해가면서 꿈을 키우고 있었다. 내겐 생소한 분야, 보편적인 또래의 경로를 벗어난 동생 일상 이야기들은, 나이를 떠나 듬직함과 강직함을 느끼기 충분했다. 근무하는 4일 간 아주 친해졌지만, 여느 관계들처럼, 스태프 업무가 마무리 되면서 가끔 연락을 전해 듣게 됐고, 그러다가 자연히,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연락 끊긴 동훈이가 파리에 있었다. "너가 왜 여기서 나와?" 근무 중이어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지라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그럼에도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매장을 나왔다. "아니, 서울에서도 우연히 못 마주쳤는데, 파리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그냥 스쳐 지나갔을 만남이, BTS를 좋아하는 파리 소녀 덕분에, 특별한 인연이 됐다. 고마운 마음에 식혜와 젤리과자를 안아름 사줬다.


며칠 뒤 파리에서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 전 동훈이와 저녁을 먹었다. 동훈이는 좋은 기회로 파리에 정착해 연극 배우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밥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들. 우리 모두 '직장인'이라는 일반적인 경로를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분야인지라 각자의 꿈을 세세히 이해하진 못했어도, 꿈의 방향성과 꿈을 대하는 진정성을 서로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내게 파리는 동생과 나눈 설익은 꿈이 서려있는 공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게 다 BTS 덕분이다.




새해 첫 날, 동훈이한테서 카톡이 왔다. "잘 지내시죠 형? 프랑스 인연이 너무 독특해서 기억에 많이 남네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파리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을 동생의 꿈이 반드시 빛을 발하길, 내 꿈도 빛을 발하길, 기원한다. 기원하는 김에 꿈을 이룬 뒤 파리에서 동생과 다시 만나는, 그런 꿈도 괜시리 함께 꿔 본다. 


아,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파리 소녀의 꿈도 조만간 이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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