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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릭Langlic May 25. 2023

입만 산 사람의 발레 계약 체결 건

 계획적인 망나니 직장인의 셀프 결재: 발레 1 (1개월 차)

오늘의 노래 / Alvaro Soler - Sofia

Sueño cuando era pequeño, sin preocupación en el corazón

: 어릴 적 아무 근심 없이 꾸었던 꿈이 생각나는 스페인어 노래 (야근 시 흥겨울 수 있음)



직장 생활은 사람에게 주기적으로 이상한 짓을 하고 싶게 만든다. 아니, 스트레스가 그렇게 만드는 걸 수도 있다. 나의 최근 증상은 귀갓길에 모 아이스크림 신제품 사 먹기(맛없었음), 책 한 권 베껴쓰기(수도승 소리 들음), 야근하는 사무실에서 혼자 너프건 쏘기(세 번만에 생수병 맞춤) 등이었다. 발레를 시작한 것도 그중의 하나였고.


원래 덕질취미를 모아서 기록해 볼까 했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내 취미는 너무 산발적이고 설명하기 애매한 점이 많아 통합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와중에 일부는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재미없어서 '진짜 이상한 사람' 소리를 한 칠십 번 들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나마 확고한 정체성은 직장인이니까 '셀프 결재 시리즈'로 묶어보려 하는데, 나는 취미를 해학의 정신으로 즐기는 편이라 반말체로 작성한다. 그중 발레는 아직 취미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한 '딜메모(가계약) 체결'의 건이다. 하지만 올해 봄에 나를 좀 즐겁게 한 딜메모라 기록을 남기기로 하였다. 발레를 처음 하는데 유연성이 없어 걱정되거나, 왠지 너무 예쁜 운동 같아서 부담스러운 분들이 참고하기 좋은 후기일 듯하다.


발레를 시작하기에 나의 스펙은 한없이 부적합하다. 유연성은 지구 반대편으로 택배 보냈고, 춤 비슷한 운동에서 안무/동작 암기를 유난히 못 하는 타입이며, 발레에서 권장되는 체형이 되려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발레와 나의 교집합은 딱 두 가지, 발레 공연의 감상자이며 프랑스어를 알아듣는 것이다. 그것도 취미 중 장르를 가리지 않는 덕질 덕이다. 그게 이 글의 제목이 입만 산 사람인 이유임. 뭐 그래도 취미로만 할 거니까 괜찮겠지 싶어 1달 고민하고 시작하기로 했고, MBTI 유료검사 결과지상 99%의 TJ답게 회사-집을 잇는 동선을 시뮬레이팅한 후 가장 최적화된 곳으로 무작정 방문예약을 하고 찾아갔다.


방문부터 등록까지 딱 15분 걸렸다. 발레 해보셨나요, 아니요. 그럼 기초반인데 시간표 보실래요, 회사 때문에 화금 저녁반 할게요. 아 벌써 등록할 마음을 먹고 오셨군요, 네 결제요. 완전한 초보를 하나 더 가르쳐야 하는 원장님의 낯빛은 발레 공연을 자주 보긴 한다는 말에 오, 하며 2% 정도 밝아졌다. 하지만 언제나 감상자는 창작자가 되기 힘들... 아무튼 그 후 일반 발레슈즈를 사 와야 한다는 말에 번거로우니 그냥 학원에 있는 것 산다고 하였고, 가죽과 천 재질 중 더 편하게 느껴진 후자를 골랐다. 사이즈 반업하는 게 보통이라고 하더라. 초보라 당분간 발레용 장비(복장)는 필요 없어서 다행이었다. 뭘 하지도 못하는데 예쁜 레오타드를 갖춰 입고 휘청거리면 그것도 좀 웃기고, 어차피 인스타 할 거 아니라 세 달 정도는 기존 헬스 복장을 차용하기로 했다.


첫 수업 때, 나처럼 처음 온 사람이 두 분이나 있어서 안심하고 수업 전 1~6번 발 포지션과 기본 손동작을 배운 후 본 수업에 들어갔다. 대충 질끈 묶은 머리, 맨발의 발레슈즈와 레깅스에 운동용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뒷줄에서 스트레칭을 먼저 진행했는데 처음 왔다는 두 분이 160도 정도로 유연하게 다리를 찢으셔서 상당한 배신감을 느낀 후 구부러지지 않는 각목을 확인했다. 그분들은 한없이 지젤 같았지만 나는 굳이 따지면 매드맥스에서 머신건 쏘게 생긴 쪽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묠니르를 휘두르거나 총 쏘는 걸 더 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꿋꿋이 계속했다. 당당하게 그다음 바(Barre) 수업으로 넘어갔다. 나로서는 상상처럼 예쁜 동작을 한다기보다는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용어 듣기-직역-동작과 연결하기. Tendu-팽팽하게 당겨진-발끝, Plie-접다-다리, En Avant/Haut-앞/위인 채-팔. 아 발레 공연에서 보던 그거. 말이야 아주 잘 알아들었지만, 머리와 몸 사이 신경계가 연결 불량인지 허우적대다 끝났다. 나오면서 생각보다 무척 힘들고 물에 젖은 몰골이 된 걸 보고 묘한 만족감에 계속하기로 오히려 결심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처음보다 더 잘 알아듣고, 스트레칭 시간에 앞줄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신경계가 '모바일 데이터 연결 없음'에서 2G 정도로 바뀐 거라 큰 진보는 없다. 그나마 개선된 점은 거북목이 천천히 펴지고 있고, 자세가 훨씬 곧아졌으며 다리가 찢어지는 각도가 45도에서 100도 정도로 진화하였다. 하지만 그 외는 음... 나만 바람에 흩날리는 상암동 억새밭처럼 발끝으로 잘 못 서고 있다. 그럼에도 매 시간 사지의 뼈와 근육이 재조립되는 개운한 고문에 중독되어 열심히 나가게 되는 증상이 생겼다. 이거 디스토피아 SF물인가. 한동안 할 것 같으니 150도 찢을 수 있는 다리가 되면 다시 올려 보겠다. 아무튼 야근 많이 하는 사람이 하기에 매우 좋은 운동이다. 개인적으로 필라테스보다는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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