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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릭Langlic Jul 31. 2023

직장인 노마드: 낯선 초대 (상)

야사스, 그리스 섬의 진짜 로컬 여행담

2023년 7월 중순.

케팔로니아(이타카) - 아테네 - 로마.


사실 내가 그리스를 찾아갈 줄은 올해 초에도 몰랐다. 살면서 찾아온 또 다른 우연의 순간이었고, 30대의 나는 그런 무모함에 유연한 편이었다.


올봄, 집처럼 고요한 사무실 자리에서 냉동 슈톨렌만큼 딱딱한 계약서 조항을 고치고 있을 때쯤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이탈리아 지인 부부가 여름휴가를 보내는 곳에서 함께 지내겠냐는 제안이었다. 생전 처음 듣는 그리스의 서쪽 섬. 생소한 지명이었고 비행기로도 최소 두세 번 환승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휴가를 길게 쓸 자신이 없어 처음에 거절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권유를 받았을 때 내 안의 무료한 자아가 7월 중순이면 급한 일이 끝나서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마쳤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처음 경험하는 것들에 거리낌이 없어졌고, 이런 특질은 어찌 된 일인지 본성처럼 매년 더 강하게 올라오곤 했다. 한번 결심하면 개의치 않는 성격이었기에 알겠다는 답변을 보내고 항공권 중 가장 시간대가 맞고 저렴한 것을 예매하였다. 사무실이라는 나의 세컨드하우스에서 그들의 세컨드하우스로 초대받은 셈이었다. 다만 방문 시기에 대한 계산은 역시 가기 직전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징크스처럼 3일 이상 휴가를 쓰면 꼭 무슨 일이 터지고 닥치는데, 이번 휴가는 다년간의 근속 동안 가장 긴 기간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당일까지도 밀려드는 일거리와 싸워야 했는데, 팀원들이 없었으면 항공 와이파이 구매해서 하늘에서 일할 뻔했다.

톰 크루즈의 영화가 한창 개봉한 시기였기에, 영화의 배경이 된 아부다비 공항에서는 영화를 한창 홍보하고 있었다. 영화 제목이 붉게 인쇄된 의자에 기대서 기내 스크린을 켜니 그 작품 시리즈가 죽 큐레이션으로 나열되었다. 직업 때문에 공교롭게도 극장에서 전날 그 멋진 영화를 보았으나 아부다비가 배경인지는 그때 알았다. 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 무언가, 예를 들어 A를 접하면 그것에 관련된 장소와 키워드, 단서가 주어지는 일. A를 접했기 때문에 유관한 것들에 시선을 두고 집중하게 되는 효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신기했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눈을 감자, 이륙 전 대책 없는 짓을 저지르는 일종의 배덕감과 그것을 차분하게 수용하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처음 가는 나라고, 지인과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처음의 기분'을 누리는 셈이었다.


지인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사무실에서였다. 나에게 대부분의 사건은 일할 때 일어난다. 한국어로 타투를 하고 싶다는 어느 외국인의 DM이었다. 원하는 단어를 알려주고 사소한 친절로 여겼기에 그 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그녀는 가끔 소소한 일상 공유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도용과 스캠이 난무하는 세상이었기에 온전히 믿기 어려웠으나 사실과 직감을 섞어 괜찮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따라 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며 안 좋은 사람에 대한 감이 길러진 덕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의 대화가 지나고 그녀는 낯선 초대장을 보냈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는데 여름휴가를 보내는 별장이 그리스 어느 섬이라고. 구글 맵에 의존해서 찾아보니 그리스 서쪽의 큰 섬이었다. 케팔로니아, 블로그 후기도 유명한 동굴 외에는 몇 없는 곳이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맘마 미아와 글래스 어니언, 만화판 그리스 로마신화, 파란 산토리니만 나왔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혹은 거기 가면 그리스 아폴로 신 같은 잘생긴 사람들이 가득한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나 들었으나 나중에 검증컨대 그건 한국 오면 다 송강 배우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어느 쪽이든 모르는 문화에 대한 환상은 늘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리스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호메로스와 일리아드 등을 읽었지만 그건 몇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알량하게 믿을 건 취미로 익힌 그리스어 철자법과 아이네아스 읽으려고 고등학생 때 서울대 가서 배운 라틴어 지식이었다. 주변에서 소위 랭귀지 보부상이라고 놀리는 취미인데, 왜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도움 될 날이 오다니 그 또한 인생의 신비였다. 미약한 도움이겠으나 아무래도 되겠지 싶었다. 기내에서는 심심해서 추억으로 챙겨간 앗!시리즈 그리스편과 다운로드해 둔 전자책, 유튜브 게임 영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부다비에서 10시간 정도 레이오버로 공항 내 호텔에서 간단히 자고 씻은 걸 포함하여 두 번의 비행을 하면 아테네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레이오버 때는 아침에 비행기를 타러 가니 공항 내에서 이슬람 기도가 흘러나왔다. 중동은 경유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알아들을 수 없지만 쿠란의 구절로 짐작하였다. 이후 도착한 아테네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공항은 한산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무척 붐볐는데, 각국 유럽 지역으로 향하는 목적지 목록을 보니 기차역 같은 거점 역할을 하는 듯하였다. 자가환승이기에 위탁한 캐리어를 찾고 면세점에서 술과 각종 올리브 구경을 하는데 친한 언니가 퇴근할 때 술을 살 거라며 직장인의 하울링을 시전하였다. 역시 회사 다니는 어른이들은 한마음이라며 앞에 놓인 우조(그리스의 전통 술)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기쁜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6~7시에 지인을 만날 일정이었는데, 이 나라는 저녁을 더 늦게 먹는다는 사전 지식을 들었기에 환승을 기다리다 눈에 띈 동그란 간식을 사 먹었다. '루쿠마데스'라는 그리스 간식으로 찹쌀 도넛처럼 생긴 빵이었다. 헤이즐넛을 골랐더니 초콜릿을 가득 뿌려줘서 칼로리와 혈당이 괜찮을지 잠깐 고민하였으나 쫄깃한 식감이라 맛있었다. 그리고 알았어야 했다. 앞으로 일주일 간 혈당 스파이크를 간이 체험할 것임을...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게이트로 가서 지인을 위해 기초 이태리어와 그리스어를 교차 학습하며 비행기를 기다렸다. 게이트 전광판에 내가 탈 스카이 익스프레스가 아닌 다른 항공사가 계속 적혀 있어서 기다리면 바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유 불명의 한 시간 지연이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는 그리스인 가족들이 혼자 서 있는 한국인을 챙겨주어 당황하지 않고 탈 수 있었는데, 이때 딱 1시간 동안 익힌 언어가 여행 내내 꽤 도움이 되었다. 이환위리(以患爲利)가 이런 경우다.


짧은 비행을 마치고 케팔로니아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지인 부부가 기다리고 계셔서 그분들 차로 섬 안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때 내가 살인마도 사이코패스도 아닌 것 같다는 안심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소소한 수다를 떨며 굽이굽이 산길을 타고 들어가는데, 이 섬에는 공항 주변을 제외하면 신호 자체가 없다고 하셨다. 참고로 체류하는 동안 섬을 많이 돌아다녔는데 진짜 없었다. 그렇게 현지 그대로의 삶 체험이 시작되었다.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이며, 관광지와는 무척 다른 날것의 매력적인 일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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