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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릭Langlic May 07. 2024

트라우마면 어떠한가

 '어쩌다 팀장'이 된 당신에게 들려주는 오피스릴러 - 시즌2 1편

무척 바빴습니다. 대부분의 삶을 사무실에서 보내니 이야깃거리의 대부분이 회사가 됩니다. 노동자의 3대 대화 주제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날씨, 출근, 건강이라지만 회사에만 갇혀 있으면 그마저도 매일 다른 농담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 주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질리지 않는 것 아닐지 실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피스릴러로 돌아와 다시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의 많은 공포 이야기 중 제가 가장 잘 아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은 회사가 그 배경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스릴러라는 시리즈 제목에 걸맞은 화제 중 오늘은 더없이 사적이면서도 더없이 직장생활과 결부된 '트라우마'를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요새 많이 들린다는 단어긴 한데, 사실 그런 지는 몇 년쯤 된 듯합니다. 트라우마는 보통 정신적 외상을 이르는 정신의학 용어인데, 라틴어에서 비롯하였다고 합니다. 가장 큰 원인이 모종의 정신적 충격 내지 상처이기에,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은 유년기의 상처부터 갖가지 부정적인 경험, 나아가 전쟁까지 다양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상처 입었다고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이 방패로 많이 내세우곤 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나는 전 연인의 이런저런 트라우마로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오히려 상대에게 다른 상처를 주는 흔한 경우도 있지요. 여러 이유로 꽤 가볍게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회사와 상관이 있을까요? 회사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쉽게 말하기엔, 대부분의 경우 어차피 회사 인간관계는 정글입니다. 통상적으로 상처를 입고 일을 완전히 그만두기엔 생계가 걸려 있을 테고, 어느 정도 질기고 강한 마음을 기르지 않으면 누가 보살펴주는 이 없는 저 같은 노동자는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사막의 잡초처럼 버티는 힘을 기르게 되지요.


그럼에도 고백하면 나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입니다. 친한 주변 사람에게는 트라우밍아웃(?)을 잘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익명의 장소에서 말해본 것은 거의 처음입니다. 이렇게 글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어쩌면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요. 나의 트라우마가 회사에서 생기지는 않았으나, 직장생활이 이를 악화시키는 한편 효과 자체는 둔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길항 작용처럼요. 길항 작용은 어떤 현상에 두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때 서로 그 효과를 약화 혹은 소멸하게끔 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나의 트라우마는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겪은 스토킹과 성희롱 등에 기인하였는데, 처음에는 어렸기 때문에 그것이 트라우마를 심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자라면서 추가적인 동종의 경험으로 인하여 사실은 이 고통이 누적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지요. 비슷한 경험을 할 때마다 상처 난 자리를 한번 더 베는 것과 같습니다. 가해자 중 일부는 이미 좋은 배우자의 가면을 쓰고 결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시는 내 삶과 교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뻔한 주제이죠? 아무튼 내가 이 뻔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특정한 사상도, 상처에 대한 전시도 아닙니다. 스무 해가 넘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또 같은 경험을 마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조직생활을 하면 나의 트라우마 분야와 같은 경험을 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사회경험이 적고 젊은 사람일수록 말이지요. 외관이 아름답고 멋진 사람만 이런 일들을 겪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직의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만만함'을 무례해도 되는 요인으로 포착합니다. 젊은 신입사원이나 3년 차 정도의 사원 입장에서 본인이 또래보다 철들었다거나, 나 정도면 눈치도 빠르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쉽게도 험한 사회생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눈에는 한없이 귀엽습니다. 그 귀여움을 만만함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보듬고 싶은 후배로 해석하느냐 등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인간성에 달린 문제지만요. 이 잘못된 귀여움이 낳는 문제는 접두어가 '성'일 뿐, 여타 갑질 문제와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직장에서의 이 쪽 가해자들은 위계와 직위, 성별과 나이 등 본인이 앞세울 수 있는 모든 권위로써 '그런 짓'을 저지를 것입니다. 아주 거리낌 없이요. 심지어 본인이 가해하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만만해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무조건 까칠하게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점이 되지만, 이 글에서 언급한 '성'의 문제는 그런 단순한 행동이 해법은 아닙니다. 보통은 당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미 오래 같은 고통을 겪은 나의 입장에서 이런 경험들은 영혼을 다시 찢어 조각내는 행위와 같았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트리거를 유발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묘하게도 나는 트라우마로부터 예전보다 자유로워지게 되었습니다. 계속 같은 고통을 과부하한다고 상처가 나을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한 트라우마로 진단받을 수도 있는 악화 요인이지요. 그보다는 트라우마와 나를 분리하여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특별히 내가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일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고독에 가까웠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내가 아파서 주저앉는다고 나의 생계와 미래를 오롯이 책임져줄 사람이 저 자신밖에 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재수 없는 가해자가 아니꼬워할 만큼 높은 자존감으로 사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PTSD 증상에 힘들어하면서도 그런 문제를 가진 나 자신에 대한 인정, 그리고 가해하는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선택이 나를 여기까지 생존하게끔 하였습니다. 음, 솔로가 괜히 해보는 소리라고 해학적으로 해석하셔도 됩니다. 아니면 별로 안 당해봤으면서(?) 뭘 모르는 소리라고 풍자적으로 해석하셔도 괜찮습니다. 단지 일개 직장인으로서의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저 같은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이 글이 팀장이 들려주는 오피스릴러인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입사할 때부터 얼굴만 마주치면 습관처럼 치근대던 분 하나가 있었는데, 반말과 함께 꿋꿋이 수작을 일삼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빠른 승진으로 보직을 단 후 그를 마주쳤을 때 그는 입사 이래로 처음 보는 공손한 두 손과 함께 90도로 인사하였습니다. 처음 보는 태도에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안녕하십니까, 팀장님.이라고 인사하고 지나갔습니다. 이런 소름 돋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데 어찌 스릴러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심심할 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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