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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랭릭Langlic Mar 02. 2024

눈치 없는 돌쇠

한국인의 2024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 방문후기

매년 초 열리는 대만의 타이베이 국제 도서전(台北國際書展, Taipei International Book Exhibition). 출판사 외에는 아무도 개인적으로 방문한 후기가 없어서 직접 가보고 쓰는 글이다.


이 방문 배경에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있다. 평생 그만 읽으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지독한 책벌레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서적까지 손을 뻗게 되었는데, 수집은 물론 각종 언어의 완전한 독해를 포함한 단순히 '읽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이 과정에서 쓸모없이 수집한 다양한 언어의 책들이 적체되었는데, 재미는 없겠지만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표지들이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소개해봄직하다. 이런 탐구로 인하여 독해 및 청해가 회화 실력과 월등히 차이나는 기형적인 개인기를 갖게 되었다. 바이링구얼(Bilingual)이 'Bye'lingual이라는 인터넷 농담이 있듯 언어 수가 늘어날수록 머릿속은 온갖 단어와 문장이 뒤꼬인 회백질로 변해갔다. 논문을 읽으면서도 입 밖으로 잘 뱉지는 못하기에, 회화까지 유창하게 해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식적으로는 0개 국어로 살고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책과 활자' 덕질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4년을 넘기며 개인적으로 혹독한 겨울을 지낸 후, 강한 세로토닌 분비가 필요하였던 나는 마음속에만 품었던 해외 도서전을 가보기로 하였다.


그동안 해외 도서전을 꺼렸던 이유는 단순히 비용 때문이었다. 큰 국제 도서전은 매년 프랑크푸르트나 런던 등지에서 열리지만 긴 휴가와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다. 넉넉지 않은 수입과 과로에 시달리는 나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매년 서울에서 열리는 도서전만 십년 넘게 참석하였다. 그나마 가까운 곳이 대만이었으나 근 몇 년 간 코로나19 등으로 인하여 대만 방문이 어려웠다. 24년도에는 좀 더 건실하게 살아야 하지 않나 싶었으나 개인적인 비극과 가족사가 얽혀 힘들었던 올겨울에 대해 해외 도서전이라는 행사는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덕질 동기였다. 행사 일이 주 전에야 결정하여 항공권을 결제하였고, 도서전 주최 측에 일반 관람객도 즐기는 행사인지 확인차 묻기도 하였다. 회사와 여러 사정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거의 주말뿐이었다. 올해 타이베이 도서전은 2월 말경 타이베이 101 부근의 무역센터에서 개최되었다. 2월에도 무더운 대만은 도서전을 방문한 주말만 희한하게 평균 14도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다. 첫날 긴팔티에 적당한 카디건을 걸치고 다녔으나 다음날부터는 겸손하게 경량패딩도 챙겨 입을 기온이었다.

개장 30분 전, 무역센터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오픈런이 성행하는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인지 몰라도 예상보다 훨씬 짧은 줄이었기에 내 앞에는 50여 명 정도가 전부였다. 미리 부스를 살피며 개인적으로 궁금하였던 경문학(징원쉬에) 출판사 부스 등의 위치도 확인하였다. 노란 조끼를 입은 매표 직원이 온라인 예약 여부를 확인하고 정각에 맞춰 표를 나눠주었다. 방문자들은 대부분 대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거나, 근방 유사한 언어문화권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 듯하였다. 입장하여 들어가니 어린이 대상 부스가 모여있었는데, 귀여운 악어 인형을 판매하고 있었다. 한국 도서전과 달리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을 단체로 인솔하는 교사도 서너 팀 목격하였는데 도서전이 일종의 견학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전반적으로 밝으면서 진중한 분위기였다.

도서전 풍경 중 일부

그럼에도 한 구석에는 재미있는 전시들이 있었다. 주빈국이 네덜란드라 익숙한 토끼 캐릭터인 미피를 중앙에 전시하고 있었다. 영유아 시절에 보던 미피 동화책이 반가웠는데 네덜란드산 토끼인 줄은 이날 처음 알았다. 아이들과 부모가 가득 모여있는 미피 부스에서 옆으로 넘어가니 회전목마와 놀이동산을 모토로 한 중소서점 부문이 있었다. 돌아가지 않는 회전목마에 독립서점의 도서들과 웹소설, 표지가 독특한 책과 굿즈 등이 가득하였다. 그런 책들 사이에서는 가끔 흥미로운 주제의 도서를 발굴하는 재미가 있기에 보여 둘러보고는 하는데, 개중에 대만 토속어를 다룬 듯한 책이 있어 한 권 구매하였다. 대만 현지에서는 번체로 소통하면 대부분 문제는 없으나 엄연히 오래된 토속어가 존재하기에 다른 언어와 비교해보고자 함이다. 언제 억양을 얻어들어본 적이 있는데, 해당 언어에 무지하여 긴 종을 여러 번 울리는 듯이 들리던 음이 기억에 남는다.

 이러한 재미를 찾으며 회전목마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처음으로 한국어 책을 발견하였다. 국제관 쪽에 한국 부스가 따로 있었으나 그곳은 영어로 번역되거나 한 아이들 교육용 교재 위주였다. 내가 회전목마 쪽에서 발견한 한국어 책은 그것과는 무척 달랐다. 애초 같이 전시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무엇이었냐면... 이런 것이다. 

대만에서 발견한 돌쇠. 저작권은 원작자에게 있습니다.

BL을 주로 다루는 대만 출판사가 수입한 듯하였다. 선비 옆의 일러스트가 차마 첨부하기 낯간지러운 돌쇠라서 부득이 자르고 올렸음을 양해 바란다. 도서전에 따라온 동료는 한참 웃고 오늘의 가장 멋진 도서라며 즐거워하였다. 하긴 대만은 일본 못지않게 서브컬처 문화가 발달한 나라이다. 타이베이 역에서는 거대한 가챠 존을 볼 수 있고, 시내의 온갖 전시에서 산리오나 포켓몬 등의 2D 캐릭터 콜라보레이션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 도서전 한쪽에서는 웹소설과 웹툰을 주요 작품으로 내세운 대만 출판사도 있었는데, 나에게 라인 웹툰 앱을 설치하여 이벤트에 참여해 달라고 설명하였다. 한국 사용자라 설치가 어렵다고 하고 한국 네이버 웹툰 앱으로 보여주자 어쩐지 사은품을 주었다. 덧붙여 일본관에서는 도서보다는 캐릭터별 우표와 엽서를 대량으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부스 안에 사람이 꽉 차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년 한국 도서전 때 개장 전부터 줄이 길어 국내 독서율에 의구심을 품었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80%의 사람들이 슬램덩크와 판타지 코너로 달려가던 기억이 났다. 젊은 사람들의 서브컬처가 출판계에 어떤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느껴지는데, 대만이든 한국이든 그 외의 부스는 비교적 한산한 것이 아쉬웠다. 큰 비판은 아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나는 그 분야 또한 좋아하니까. 

도서전의 또 다른 풍경들

책벌레로서는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서너 개의 출판사에서 총 8권의 책을 구매하였는데, 대만 토속어 외에 영미(비)문학 번역서 몇 권, 대만 소설가의 인기작 등이다. 유명한 작가인 천쓰홍(陳思宏)의 <귀신들의 땅鬼地方>도 그중 하나이다. <귀신들의 땅>은 이번에 새로 번역되어 국내에 공급된 작품인데 민음사가 출판하였다. 그 외 눈에 닿는 것들은 많았지만 귀국할 때 부러진 어깨를 들고 정형외과를 가게 될 미래를 예방하여 그 정도에서 그치었다. 나머지는 사진으로 담아 왔으니 국문으로 번역되거나 수입되면 구매해서 볼 요량이다. 오랜만에 보는 세로 쓰기 방식의 도서가 반가웠다. 사진처럼 대형 출판사에서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제공하고, 현장 할인도 활발히 하였으나 90% 이상이 중국어로 번역되거나 저술된 책이었기에 해당 언어를 읽을 셈이 아니면 딱히 방문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한편에 루카 고양이 등 귀여운 소품을 팔긴 하지만 극히 일부이다. 

도서전의 책들

 이곳에 가기 전 혹여 굳이 비용을 들여 갔는데 실망할까, 나의 취미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가서 무엇을 얻어오긴 할까 등 이런저런 생각에 망설였다. 하지만 실망하더라도 가 보자는 결심은 뜻밖의 기쁨으로 돌려받았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은 겪기 어려우나 좋은 것이다. 더 거대한 유럽 도서전은 근무시간과 유류비 때문에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틈이 난다면 다녀오겠다. 당분간은 사온 책을 탐구하려면 몇 달은 바쁠 예정이다. 사랑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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